초월항과 성급함 그리고 관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돌아보는 순간에 세헌샘이 아침놀 서문에서 인용해 온 문헌학적 읽기, ‘섬세한 손과 눈으로, 천천히, 깊이, 전후를 고려하라’던 (서문 17쪽) 말이 떠오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유난히 학인들의 말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며 제 리듬을 잃어버렸는데요, 이것이야말로 외부의 자극에 사로잡힌 가장 무능한 상태구나 싶었습니다. 이 성급함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생하고 습관이나 익숙한 감각을 배출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죠. 학인들의 말과 제 생각을 입안에서 굴리며 음미하는 힘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소진을 경험했는데요. 함께 배우는 장에서 이런 성급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뉴페이스 세헌샘을 향해서 말할 때 다수가 유독 가르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영아샘이 말해주었지요. 가르치는 행위는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겠단 열망에 닿아있죠.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감각입니다. 니체는 아침놀 서문에서 ‘도덕에 충실하기 위해 도덕에 대한 신뢰를 철회’한다고 밝히고 있어요. 여기서 말해지는 ‘신뢰’는 중재자 혹은 초월자로서 도덕을 상정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신뢰라는 힘은 도덕을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에 가져다 둡니다. 자신의 앎을 객관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행위는 이런 도덕과 관계맺는 방식을 닮아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중재의 역할을 내맡기는 ‘도덕’, 도덕 대신 자신의 인식을 그 자리에 끼워넣는 것이죠. 이 충동이 배움을 서로 조직해내는 존재들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때론 가르치겠단 욕망은 자신을 초월항에 두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합니다. 도덕적 감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우월감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한, ‘도덕에 충실’한 감각을 모색하기는 어렵겠지요. ‘신뢰’란 말에서 쾌함을 느꼈었는데요, 신뢰에서 느끼는 무조건적인 쾌함은 무엇인지도 살펴봐야겠습니다.
성급함으로 돌아오죠. 이번 세미나에서 저의 성급함은 다양한 목소리들의 번다함을 참을 수 없어 그것들이 조직해가는 힘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해. 나야말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목소리야.’란 무언의 표현이었죠. (승연샘이 ‘전체가 있기는 한 걸까요?’라고 물을 것만 같네요.ㅎㅎ) 니체는 도덕의 공위(空位)의 시대에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는 도덕적 감각을 가지라고 했는데요. ‘도덕에 충실’하라고 할 때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감각과 관련짓게 됩니다. 니체를 공부하며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여전히 낯선 감각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충실함이며, 어떤 신뢰를 구축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주인이 되면서도 초월자로 두지 않는 것은 단독자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자,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과 관련될 것이란 어렴풋한 짐작만 하면서 또 넘어가게 되네요.
초월항과 위계가 아니라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도덕, 진리, 이성(인식)과 같이 우리에게 초월항으로서 작동하는 것 중에 하나가 철학입니다. 철학이라는 말에서 저는 벽돌같은 딱딱함을 느끼는데요, 이런 저의 감수성을 나풀거리는 ‘나비’로 둔갑시키는 절이 있습니다. 작고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한 개체의 강인함을 증거하지요. 단 하루만 살 수 있단 것을 알아도 자신에게 찾아올 밤이 차가울 것을 염려하지 않는 나비, 나비이기에 만들 수 있는 철학이 있습니다. 이 나비의 철학이란 자기만족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비의 철학이 만들어지는 지평, 나비가 인식하는 관계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나비의 존재성을 저는 서로가 힘, 충동, 해석으로서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했는데요. 이 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또한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라고 말해지는 철학을 학인들이 가져온 ‘건강, 인식, 이성과 진리, 표면적 도덕, 실험체로서의 나’와 관련시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못다 한 이야기는 저에겐 두고 생각해 볼거리입니다.
니체가 새로운 눈으로 발견한, 나비가 날고 있는 해안가가 있습니다. 나비가 밤의 차가움조차 잊고 유영하게 하는 훌륭한 식물들과 공존하는 세계지요. 후기를 쓰기 위해 이 절을 다시 읽으면서 문득 호기심이 생깁니다. 우리도 세미나를 밤의 차가움조차 잊을 수 있는 유희의 장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작은 목소리나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함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요?
이 철학 전체는 그것의 모든 우회로와 함께 어디로 가려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지속적이고 강한 충동을 이성으로 번역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가? 이러한 충동이란 (...)생활 습관, 요컨대 내 취미에 가장 적합하고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충동이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이 아닐까? (...)아마 그것들도 모두 그러한 개인적인 충동들의 지성적인 우회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는 새로운 눈으로 나비 한 마리가 은밀하고 고독하게 바위로 된 해안가를 나는 것을 본다. 이 해안가에서는 훌륭한 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나비는 자신이 단지 하루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자신의 허약한 날개에는 밤이 너무 차가울 것이라는 사실을 염려하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아마 나비를 위해서도 하나의 철학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의 철학이 아닐지라도. (아침놀 553절, 우회로에서)
사실 성급함에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 아닐까요? 알아채는 순간이 바로 방향 전환을 할수 있는 지점이겠지요!! 샘이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자,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과 관련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알아채는 순간과 연결될 것 같네요. <잠언 553> "우회로에서"가 철학과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어 저도 좋았는데요. 초월적인 형이상학으로서 철학이 아니라, 바로 대지에 발디디고 있는, 지금 일상에서 질문을 던지며 자기 단련으로서 철학을 해야함을 말하는듯 했어요!! 하루를 사는 나비는 그런 자신의 허약함을 알고 있음에도 철학하는데, 우리가 병들었다면 더욱더 자신의 느낌(충동)을 보살피는 철학을 해야한다는 것 아닐까요? 경희샘의 세심하고 따뜻한 후기 감사해요^^
흥미진진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니체 사상에 대한 특정한 흐름'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라고 생각했지만 행여나 저의 말과 글이 듣는 분들에게 상처가 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제가 잘못한 것이고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너무 열정적으로 하다보니 생겨난 일이라고 생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누구를 특정한 비판이 아니라 전반적인 니체 사상을 해석하는 흐름에 대한 제 자신의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허탈한 마음도 있지만, 원모어 니체 팀 성원 모두 세미나를 통하여 좋은 결실 이루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현재 단톡방을 나간 상태라 이렇게나마, 마지막 인사를 올립니다.
제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낀 세미나였고 그동안 많은 분들을 통하여 좋은 내용을 배우게 된 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인사말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늘 강건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