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간이 다가왔어요. 서평쓰기니만큼 지엽적인 것에 갇히지 말고 신곡의 본질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글을 쓰라고 하셨지요. 너무 지당한 말씀임에도 천국의 빛처럼 우리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지평이네요.^^
이번 세미나에서 천국을 ‘천옥’이라 말하는 은옥샘을 보면서 연옥에 대한 갈망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산책을 하면서 해민샘이 두 군데는 ‘옥’인데, 왜 천국만 ‘국’이냐는 말에 난희샘이 감옥을 의미하는 ‘옥’자가 아닐까,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자를 찾아보니 獄(감옥‧옥)자를 쓰고 있네요. 국은 國(나라‧국)이구요. 『연옥의 탄생』에도 연옥을 지옥과 천국 중 어디와 가까운 것으로 둘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제법 있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번역할 때는 지옥에 가까운 것으로 연옥을 인식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해민샘의 말처럼, 천국은 왜 國으로 형상화되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신의 질서(경계) 안에서 ‘구성’되는 자유
천국편 5곡에서 보면 ‘의지의 자유’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입니다. 자유란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죠. 자유란 지성을 지닌 특수성을 지닌 존재에게 준 선물이지만 신과 맺어진 서원(계약)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란 태생적으로 ‘제한’을 내재하고 있지요. 신과의 결속력이 끊어진 근대에 등장한 단독적인 개인인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는 다릅니다. 중세에서 자유란 따를 수 있는 힘이자 그 속에서 각 개인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이 종속적인 상태를 자유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요.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서 다른 존재를 사유할 수 있음, 그리고 그로 인한 지평의 확장 등으로 이해하기도 했지요. 학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이 스스로 ‘육화’된 존재인 예수는 종속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자유를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몸을 지닌다는 것, 이것은 조건이자 종속의 상태죠. 게다가 몸을 떠난 삶은 불가합니다. 예수는 몸이라는 구속의 상태를 ‘사랑’이라는 인간의 역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으로 역전시키지요.
왜 베르길리우스인가? 왜 저승일까!
신곡 읽기가 종반으로 접어들고 에세이를 써야하니 각자 질문을 만들 것을 요청받고 있어요. 게 중에 베르길리우스란 어떤 존재인지, 단테는 왜 현세에서의 모험이 아니라 굳이 저승이 필요했을까,란 질문이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의 뮤즈가 된 이유를 알고싶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면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살았던 두 시대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죠. 두 인물을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 여럿 있겠지만 일단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단 말처럼 들렸습니다. 역시 베르길리우스 관련 책을 읽지 않은 탓인지 당대에 그 두 사람이 스스로 요청받았던 문학가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는 채운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로마제국의 역사에도 깜깜해서. 그래도 이해한 것을 적어보자면 이 두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려는 혼돈과 동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가 살았던 시대는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시대입니다. 공화정 체제였던 로마가 황제가 다스리는 강력한 통일된 체제로 편입되는 요동의 시기였죠. 단테가 신곡을 저술했던 14세기도 중세말기 혹은 르네상스가 태동하는 시기로 말해지는데요. 서기 1000년이 지났음에도 세상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고,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인들은 1차 원정 외에 패배를 거듭했죠. 그러니 기독교가 제시하던 비전이 현실에서 힘을 잃어갔을 겁니다. 십자군 원정과 8세기 고트족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은 유럽에 다른 나라의 풍토병(흑사병)의 창궐을 가져왔죠. 단테가 살았던 14세기는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고 신에 대한 믿음이 균열을 맞이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피렌체는 15-16세기에 금융, 상업의 발달로 정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요. 그러니 14세기의 피렌체를 살았던 단테는 그가 지녔던 문학적 감수성으로 볼 때 이 새로움의 바람을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했을 겁니다. 새로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폐허를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무너진다는 것은 어쨌든 강력한 폭력이 행사되는 장이고,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면서 신뢰와 관계가 단절되는 장이지요. 새로운 시대를 감각한다는 것은 덧없음과 환멸을 맛보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두 시인은 폐허와 환멸 위에서 ‘인간을 보듬을 수 있는, 길을 잃은 시대에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왜 나인가, 왜 내가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이 노래를 부르려는 여정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가,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겠지요.
그러고보니 신곡에 간간이 글을 써내겠다는 단테의 독백 혹은 방백과 같은 대목이 보이는데요. 그때는 혹 그가 노래를 부르는 여정 중에 길을 잃거나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1301년 추방령을 받고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나섰던 단테가 1304년 신곡에 대한 구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306년부터 1320년까지 신곡 집필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죠. 단테는 자신에게 추방령을 내린 인간과 세상에게 신곡이라는 노래로 화답한 시인이었네요.
신곡의 저승을 이미지화한 것을 여럿 보았습니다.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의 초상화, 지옥, 연옥, 천국, 현세를 배경으로 서 있는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가 그린 단테의 모습, 단테의 뮤즈인 베아트리체를 형상화한 헨리 홀리데이와 가브리엘 로세티 작품 등을 보면서 눈이 즐거웠죠. 보티첼리가 그린 지옥의 형상도 속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떠오르네요. 그림에 두 사람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데요. 반복적인 출현은 2차원 평면에 이동을 나타내기 위한 동영상적 장치였습니다. 화가의 고심이 엿보여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놓인 사람들의 육체에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흔적을 느끼게 하고, 붉게 핏발이 선 눈에서 두려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했던 들루크루아의 작품도 떠오릅니다. 놀라웠던 점도 있었는데요. 글로 읽을 때는 무심코 지나갔던 대목이 이미지화된 저승을 보면서 비로소 보였던 지점이었죠. 바로 연옥의 입구의 위치입니다. 지옥 다음이 연옥이니 지옥의 상층부에 연옥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반대였죠. 지옥의 9곡을 다 돌아서 가장 하단부에 도달하지 않으면 연옥의 입구에 가닿을 수 없는 구조였던 거죠.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옥과 연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과제가 많아집니다.
참, 단테가 저승을 택한 이유도 또 우리에게 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지요. 상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에 현실의 인물을 둔다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지, 현실인물을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제시되는 비전이 달라진다고 할 때 단테의 비전은 무엇인지 등등. 그리고 재밌는 질문도 받았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죽은 자의 목소리를 빌려와 말한다고 할 때 저승에 있는 이순신을 통해 무슨 말을 하게 할 거냐고. 순간 머리를 쥐어짰지만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통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말에 보편성을 입히는 작업이자 자신이 바라보는 시대성을 드러내는 작업같은데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또 채운샘은 저승이란 시대불문 ‘모두의 목소리’를 가져올 수 있는 구조라고 하셨죠. 모두의 목소리라, 대단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성인과 같이 잘 알려진 존재가 말하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마음일텐데, 그런 장치는 자연스레 보편성을 획득하게 하지요. 문학작품에서 구조와 내용의 관계도 재밌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에세이 주제 다시 정하느라 고심 중일텐데 역사세미나 시간에 만나 이야기해봐요.
〈공지〉
* 『신곡』, 〈천국〉편 끝까지 읽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질문이 생기는 문장을 필사해서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연옥의 탄생』 끝까지 읽고, 에세이 주제도 다시 정해서 금요일 줌에서 만나요.
* 이번 주 후기는 호호미(벌써 올려주셨네요^^), 다음 주 간식은 난희.
'자신에게 추방령을 내린 인간과 세상'에게 단테는 <신곡>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요. 우리가 에세이를 통해 각자의 버전으로 풀어내게 될 이야기가 그것이겠죠.^^ 어떤 이야기들이 풀려나올지 궁금해지네요. 일단 주제를 좀더 명확하게 다듬는 것부터~~
단테를 통해 초월적 항이라고 치부하던 '신'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인간이 신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겸손일 수 있다는 것, 지성의 극한일 수 있다는 것이죠. 신곡은 읽을수록 곱씹을수록 감동을 주는데요. 이 감동이 에세이와는 별개라는 게 늘 문제지만요 ... 흠. 그래도 샘들의 다양한 감동 포인트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