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 한 단위의 문장을 이어붙인다는 것에 대해 몸으로 고민한 한 주였습니다. 흔히 ‘어렵고 쉬운’, 혹은 ‘길고 짧은’이라는 기준으로 활동의 난이도를 평가하지만 힘의 치원에서는 그런 객관적인 기준 따위는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읽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어렵거나 쉬운 책도 아니고, 그에 대한 글이 길거나 짧을 것도 아닙니다. 이 책의 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 즉 ‘한 문장과의 만남’이 주는 벅참, 그것이 한 문장을 써나가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경험을 하죠. 마치 깊고 어둔운 숲을 헤맬 때 나뭇가지에 걸린 누군가의 표지를 만날 때, 아, 이 숲에 누군가가 있었구나, 이 헤맴이 그저 정처없지만은 않겠구나, 그리고 곧 또 다른 표지를 만나겠구나 싶은 안도감. 우리 각자의 마음에 가 닿은 문장들은 작은 등불 같은 따뜻함과 밝기로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함께 나아가도록 비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읽은 6장 7장은 제게는 앞서 읽은 다른 장에 비해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제현샘의 말대로 영화에서 카메라가 방향을 돌려 다른 씬을 연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노동 군대’의 구체적인 행보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제게는 마치 거대한 망상형 물결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이들의 ‘전도’ 활동을 지도로 그리고 싶었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와 같은 기원으로부터의 단일한 족보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출렁이는 네트워킹 그 자체였죠. 저는 이 느낌을 과제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록된 전사들의 면면은 다채롭고 그들의 ‘망상형 조직’은 한마디로 ‘인드라의 그물’이다. 하나의 그물코에서의 이슬 한방울이 전체의 망을 출렁거리게 한다. 이 출렁거리는 네트워킹 속 한 점으로으로서의 효과로 출현하는 삶들에 어떤 하나의 정체성을 부과할 수 있겠는가. 가시성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효과들은 랑시에르가 전해주는 언어에 실려 우리에게 거대한 운무로 다가온다. 우리의 읽기는 그 단편들을 현존의 질서에 빗대고 얽기설기 이어붙여 우리의 서사로 편집하는 활동이다.” 제가 받은 이 느낌은 지지난주 <5장 샛별>을 읽으며 크크랩의 남성분들이 감격하셨다던 다음 문장과도 일맥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슬은 결코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떨어지는 법을 알지 못하며, 꽃은 다른 꽃들로부터 자기 향기를 숨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식물은 고통의 치유를 삼가는 법을 알지 못한다.”(162p)
우리 조에서는 우선 노동군단에게 ‘새로운 과학책’ 생시몽주의가 ‘종교’였다는 것, 그래서 이들의 ‘전도’가 마치 사이비 종교의 활동 같지 않았느냐는 학인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저로서는 생시몽주의가 당시 노동군단에게 사이비종교처럼 ‘의지’할 만한 구석을 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생시몽주의가 사이비종교라는 단하나의 이미지로 화석화되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기에는 노동군단의 면면들의 ‘불운과 행운’이 너무도 다채롭고 그 요구들과 관계하는 생시몽주의의 조직적 전략이 늘 난항 속에 있었다는 사실 즉 “새로운 종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유대다. 노동 조직화, 이것은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제도화하는 것”(223p)인데 이 ‘제도화’가 순조롭지 않은 과정이었고 결코 완성된 적도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겠습니다. ‘생시몽주의’에 단순히 ‘노동자’들이 의지했고 그들이 전파하는 달콤한 미래적 비전에 홀렸다고 읽는 것은 너무 얇은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시몽주의에서 우리가 견지할 바는 '노동의 신성함', 이 표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노동 군단이라는 의미는 지배적 질서를 전복함에 있어 그 위계를 '노동하는 자'에 우선했다는 점에서 '위대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의 불운과 행운이 동요하는 한복판에 노동의 추상성을 출현하게 하는 사회적 동일성에 근접하는 정치적 동일시.” (217p)
우리 조에서 특히 발목이 잡혀 설왕설레 했던 문장입니다. ‘노동의 추상성’이 뭔 뜻이냐. 채운샘께서는 강의에서 이 의미를 짚어 주셨죠. 화폐가 만물의 가치척도가 되면서 노동이 ‘시간당 얼마’라는 식으로 환산되며, 땅이 ‘평당 얼마’로 환원되는 것과 ‘노동의 추상성’을 출현하게는 산업사회의 도래는 동시적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거기에 노동하는 자들이(랑시에르가 이 책에서 누누이 재고할 것을 당부하는 듯한 ‘노동’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무엇일까요) 겪는 ‘불운과 행운’의 한복판에서 누가 누구를 정치적으로 동일시하는가, 그 분할선을 긋는 것이 단순히 부르조아, 프로레타리아라는 이분적 분할일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랑시에르의 글은 이것을 말하는가 싶으면 저것을 얘기해주는 것 같고, 이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길을 만들어가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생시몽주의도 노동자들이 의지했다거나 그들에게 종교와 같았다고 규정할 수 없었는데, 너무나 다양한 욕망과 직업, 가치관 등을 가진 노동자들의 생각과 실험 등이 이를 잘 보여주었죠. 8장 앞 부분에서도 생시몽주의 종교에 온 노동자를 크게 4개의 부류로 구분했고, 실제 이 분할선을 넘나들거나 편입되지 않은 자들도 많았을 것 같네요. 힘든 노동과 비참한 상황에서도 그들이 삶에서 끌어올린 글과 사유가 고귀하게 느껴졌고, 이 문장들이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새로운 밤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비춰주는 듯 합니다.😊 샘이 랑시에르 글과의 깊은 만남이 느껴지는 후기 감사해요.👍😊
지지난주 2부를 처음 읽으면서 난희샘께서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보고 싶으셨단 얘기에 저도 공감을 했었는데요 ^^ 3부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간혹 1막이나 이런 연극 용어를 차용해서 형식을 구성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마치 그런 영화 구성을 보는 듯 했습니다. 1부가 1830년대부터 1848년 2월 혁명 사이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으로 묶였다면, 2부는 그 안의 구체적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각각의 서사를 비추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에는 1부의 그 고니가 어떻게 그 고니가 되었는지 그 과정도 슬쩍 슬쩍 드러나서 흥미로웠어요. 비록 어려운 문체에 내가 읽은게 제대로 읽은건지 매번 카오스인 상태를 느끼긴 하지만요 ^^ 1830년대의 그들의 망상형 그물코에 한 자락을 붙잡으며 함께 출렁이는 듯한... 샘의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