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2 / 무진장 일요일 5주차 후기 / 해무
봄을 시작하는 햇살이 따듯하여 절로 산책을 부르는 상큼한 아침, 분량은 적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적지 않은 『대학』을 끝내고 혜원 샘의 차근차근한 자구 해석과 함께 『중용』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산뜻했으나 『대학』 전문 암송이라는 과제가 내리쬐는 햇살을 날려 버리는 봄바람처럼 30분의 점심시간을 더 얻어 나선 창경궁 산책을 날려 버릴 만큼 거세었다. 결국 암송은 뒤로 갈수록 어버버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채운 샘은 『대학』과 『중용』 전문 암송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거침없이 주셨다.(ㅠㅠ)
5주차에 들어섰지만 가면 갈수록 오리무중 알 수 없는 사주 공부는 지난주에 이어 오행의 旺衰强弱과 生剋관계를 木과 火를 통해 배웠다. 旺衰强弱은 生剋制化와 연결이 된다고 한다. 旺하다는 것은 근기가 잘 되어 있는 것이고, 强하다는 것은 生을 받는 것, 弱하다는 것은 剋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衰하다는 것은 洩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 오행의 旺衰强弱를 木과 火의 상생, 상극과 연결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나로서는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하여 어떻게 정리를 할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희수 샘이 공지에서 잘 정리해 주셔서 그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죄송;;)
여러 학우들의 소리에 묻어 더듬더듬 『대학』 전문 암송을 마치고 시작된 『중용』 첫 강의에서 채운 샘은 주희의 <중용장구서> 해설과 『대학』 중에서 주요 구절에 대해 못다 한 코멘트를 해 주셨다. 주희가 말하는 『대학』은 격물치지를 통해서 명명덕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친민인데, 친민은 지어지선을 통해서 도달되는 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지혜를 통해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결국 대인(군자)이 어떻게 治國 平天下에 이를 것인가에 대한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통치가 가능하려면 먼저 修身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格物부터 이어지는 誠意까지고 그래야 타인통치인 濟家治國平天下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학이 나를 통치함으로써 천하의 통치까지 확장하는 것에 대한 정치학적인 텍스트라면 중용은 마음에 관한 텍스트이다. 마음은 매우 미세한 영역이다. 미세한 것이 언제나 우리를 움직인다. 그 마음을 어떻게 中에 이르게 할 것인가가 『중용』의 핵심이다.
<중용장구서>에서 주희는 도학의 전통이 끊길까 봐 자사가 『중용』을 지었고 한다. 성리학자들은 끊어진 자기들의 도통을 세우는 게 중요했다. 그 도통의 시작으로 주희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건네준 교훈인 ‘진실로 중을 잡아라(允執厥中)’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내려준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의 마음은 미세하기만 한 것이니,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을 잡게 된다”를 중용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允執厥中은 한결같고 정밀해야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 자연에서 온 것이며 우주 자연의 보이지 않는 작용이 도심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정말 작은 어떤 것이 싹 트기만 해도 중에서 벗어나고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란 것은 늘 단도리를 해야 한다. 이것이 신독이 필요한 이유이다. 마음을 오로지 정일하게 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 주희는 마음의 허령과 지각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라고 한다. 허령은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는 텅 비어 있음이고, 지각은 어떤 물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기에 따라 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미발의 상태에서 발하면 치우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근본 자체가 도심이기 때문에 치우치면서 살지만 성명의 올바름에 근원을 두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치우침을 극복할 수도 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어리석어도 도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치우침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이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할지라도 그것이 최대한 치우치지 않은 상태, 중에 딱 맞게 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유학이 얘기하는 삶의 도리이다. 근본을 지키는 것, 본말을 어기지 않는 것, 모든 것의 근본이 중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게 수행이다. 이게 공부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치를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인심이 도심을 따라 살아가면 지나침이 없게 된다는 것이 중용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희의 깨달음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