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세 번째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 의도치 않은 디자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3부에도 우리를 ‘오염’시키고 ‘교란’하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요. 분량이 많아서 모든 내용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공부하며 계속 만나왔고 앞으로도 숙고하게 될 문제들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교란은 하나의 시작으로, 항상 도중에 일어난다. 즉 교란이라는 용어에는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 교란은 다른 교란을 뒤따른다. 따라서 모든 풍경은 교란되어 있고, 교란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285쪽)
1부에서는 ‘오염’이 우리 관념을 흔들어놓았다면, 3부에서는 ‘교란’이 그렇습니다. '오염'과 마찬가지로 '교란'이란 단어도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지요. 손상되거나 어지러운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1부에서 애나 칭은 모든 존재가 이미 ‘오염된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협력은 오염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3부에서는 모든 풍경이 '교란된 풍경'임을 이야기합니다. 조화로운 상태가 교란되는 것이 아니라 교란이 교란을 뒤따르는 거라고요. 이때의 ‘풍경’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적인 배경으로서의 풍경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함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장소,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활동 장면이 가득한 살아 있는 곳”(275쪽)이 풍경입니다. 이러한 활동들로 만들어지는 배치의 패턴을 애나 칭은 ‘의도치 않은 디자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디자인은 거기에 관여한 모든 것의 총합이며, 의도한 것과 의도치 않은 것, 이로운 것과 해를 입히는 것,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것은 복잡해집니다. 어떤 오염도, 교란도, 풍경도 단순히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인간의 교란이 없으면 송이버섯 숲이 위험에 처한다고 보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교란이 너무 많이 일어날 때 송이버섯 숲이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개미집을 무너뜨리는 교란은 인간의 도시를 날려버리는 교란과 크게 다르지만, 개미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란을 산정하는 단일 기준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란은 "언제나 삶의 방식에 기반한 관점의 문제”(286쪽)라고 애나 칭은 말합니다.
저희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든 게 관점의 문제라면, 어떤 것도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결정이나 선택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는 윤리의 문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지는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토론에서는 결국 ‘현장성’이 중요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곳에서의 윤리가 무엇일지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배치가 '의도치 않은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그 배치에 관여한 모든 것의 총합이며, 그만큼 많은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 그럴 때 우리는 해러웨이가 말한 것처럼 '더 열심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한 복잡함을 인식하는 일이 '알아차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보와 근대화의 꿈은 이런 복잡함을 은폐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거나 통일시켜 하나의 서사만 흐르게 합니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흐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천 개의 고원>의 ‘나무’와 ‘리좀’ 체계와 연결지어, 전자를 나무로, 후자를 리좀으로 구분해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도와 사본의 문제에서도 보았듯이, 나무는 언제든 리좀으로, 리좀은 언제든 나무로 발아할 수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을 본격적으로 읽고 토론할 시간도 기다려지네요!
- 다음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 4부를 읽어옵니다. 2조 샘들은 메모를 준비해주세요.
- 간식은 영임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