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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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밤』 8장에서는 생시몽주의를 접한 다양한 노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으로부터 우린 연작으로 구성된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만큼 이 책의 정체성(?) 잊게 되는 것 같네요. 2부는 파편적인 얘기들이 나오면서 이 책의 주제, 핵심적인 키워드 등을 하나로 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만큼 샘들의 공통과제 내용, 관심 있는 문장과 주제도 다채롭습니다. 20년 이상 직장을 다니며 노동하고 있는 저는 그동안 노동이나 직업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고 토론하면서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과 일에 대해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회사와 일에 관하여 불만이나 억압의 관점으로 바라봤다면, 고니 등 19세기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내 자리에서 어떻게 고귀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의 질문을 화두로 주시하게 되었네요.
우리에게 노동자는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까요? 랑시에르의 글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노동에 대한 분할선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을 투영하여 읽고 판단하는 건 배움에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채운샘은 노동을 하나의 선상에 놓을 수 있는지 질문을 주셨는데요. 예컨대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는 동일한 노동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노동은 칼로 무 자르듯이 분할이 가능할까요? 실제 정신노동을 하는 경우에도 육체를 사용하기도 하고, 육체노동도 정신활동을 수반하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노동 분할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계층이 노동으로 나뉘지 않았는데요. 봉건주의 사회의 농부나 상인은 노동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노동이라는 활동은 인류의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낯선 방식일 수 있는데요. 많은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 같네요. 감정노동, 돌봄노동, 꾸밈노동 등 정말 다양한 활동을 노동의 형태로 간주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어떤 시공간적인 조건에서 감정, 꾸밈, 돌봄이 노동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이 활동이 노동으로 변환되면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질문하며 곰곰이 살펴봐야 합니다.
저번 주에 본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 <Showing Up>은 노동과 예술의 분할선, 예술에 대한 표상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조작가인 리지와 조가 나오는데요. 조는 리지의 집주인이면서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작품에 집중하기 좋은 여건을 갖춘 조에 비하여 리지는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도 돌봐야 하는 신경 쓸 일이 많은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는 리지에게 리지의 고양이가 상처를 입힌 비둘기를 맡기죠. 전시 개막일은 다가오는데 리지는 비둘기까지 돌봐야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정성 들여 만든 작품이 잘못 구워지기도 하는데요. 이 작품에서는 비둘기나 오빠를 돌보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은 일종의 돌봄이 아닐까요? 예술에 대한 경계와 분할선을 되짚어 보게 하는 영화였고요. 떠오른 영감을 기반으로 작품에만 몰두하고 일상은 접은 예술가에 대한 상을 깨뜨리는 영화였지요. 지안샘은 리지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봤고,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특히 더 공감했을 것 같네요.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생시몽주의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8장에서는 생시몽주의와 접속한 노동자들이 다양한 모습이 나오죠. 각자의 삶만큼이나 생시몽주의 종교에 들어간 마음도 달랐기에 생시몽 가족 안에는 교리를 이해하고 확신하는 이, 고용과 물질적 입지를 위해 생시몽주의에 온 사람, 자선을 받으러 온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생시몽주의 연합에서는 위계도 있었는데요. 2부에서는 부르주아, 노동자, 사도들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생시몽주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비참함에 대한 공감 및 부에 관한 경멸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생시몽주의는 교리로 작동하고 조직화를 이루면서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지요. 프롤레타리아들은 구호와 자선의 대상에서 생산하는 자, 강한 노동자로 변화되었을 뿐 여전히 사도가 뭔가를 주거나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에 가까우면서 프롤레타리아들을 대상으로 생시몽주의를 설파하고 조직에 헌신하나 사도가 될 수 없는 감독관들의 딜레마와 진통도 만만치 않았네요. 한편 고니는 생시몽주의 교리 내용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생시몽주의자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생시몽주의 가족 내부에서의 승진마저 마다한다는 점에서 가장 이기적이지 않은 자로 그의 대패가 부서질 수 있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열망을 말하죠. 자신이 배운 것을 도그마화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서 매번 출구를 만들어가는 고니가 대단하게 느껴졌는데요. 물론 우리는 이런 고니를 실체화하고 그의 말을 교리화하면 안 되겠죠? 아무리 좋은 철학도 교리로 작동할 위험이 있고 공부하는 우리는 이 지점을 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허구 개념을 본질적으로 실정적인 것으로 참조한다. 이것은 정확히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연루되어” 있는 역사(Histoire)와 이야기(récit)의 예술들에 의해 말해지는(또는 해체되는 déconsruites) 스토리들(histoires) 사이의 관계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시적 또는 문학적 언표들이 실재의 반영들이기보다 오히려 실재적 효과들을 가지고 “구체화되는(prennet corps)”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성의 분할』 4. 역사는 허구라고 결론지어야 한다면. 허구의 양식들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역사를 담았다면 역사는 허구일까요? 사실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Histoire로 이는 하나로 꿰어질 수 있는데, 랑시에르가 쓴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histiores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채로워 하나의 기준으로 정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대개 Histoire는 histoires의 소거에 의해 성립됩니다. 교과서에 명시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면, 그 역사에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제외되어 있네요. 우린 교과서에 실린 역사를 사실로 받아들이나 이것 또한 허구가 아니냐는 질문이 들 수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도 사료에 기반하여 배치되고 직조된 것이기에 유일한 사실,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요. 과거 역사 교과서에 관한 논쟁이 떠오르네요. 예컨대 5.16을 군사 쿠테타로 기록할 것인지 혁명으로 볼 것인지 역사가의 관점이 반영됩니다. 랑시에르는 허구도 현실에서 작동한다고 말하며 이는 실재적 효과를 유발한다고 말하는데요. 그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선명한 분할이 오히려 역사와 역사학의 합리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미학 혁명은 두 가지를 연대적으로 만듦(사실들의 논리와 허구들의 논리 ’그리고‘ 역사학의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양식 사이의 경계들을 불명료하게 함)으로써 유희를 재편성한다. 시의 원리는 허구가 아니라 언어의 기호들의 어느 일정한 배열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낭만주의 시대는 진술들과 이미지들의 결정권으로부터 예술을 격리시켰던 분할선과 사실들의 논리와 스토리들의 논리를 분리했던 분할선 또한 흐리게 한다. (『감성의 분할』 4. 역사는 허구라고 결론지어야 한다면. 허구의 양식들에 대하여)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가져오면서 시의 배치가 거짓말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구조를 정교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경험적 무질서에 따라 사건들을 현시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보다 사건들의 배치에 인과적 논리를 주기 때문에 시가 더 우월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지요. 예술의 논리가 역사의 논리보다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도 사료를 엮고 이어붙이는 데에 있으므로 역사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논리가 중요하고요. 허구가 직조하고 엮는 것이라면 역사 또한 허구에 포함될 수 있네요. 예술이든 역사든 모두 구성의 논리가 있으며, 어떤 논리로 직조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예술과 역사 모두 진리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배치의 짜임새가 핵심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 역사와 스토리 사이의 분할은 불명료하게 됩니다. 랑시에르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분할선을 문제 삼는 것을 미학 혁명이라고 봤으며, 미학은 정치적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예술은 최대한 불명료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동한다면 예술에 대한 비평은 그 불명료하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 논리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또한 비평의 언어는 논리적이어야 하고요. 우리는 명료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할 필요를 못 느끼지만,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 애매하고 모호한 것에 관해서는 의견을 나누고 싶지요. 여기에서 논리를 도출하지 못하고 논리적인 척하는 것을 허위로 볼 수 있는데, 비평할 때 허위가 아닌 짜임새 있는 허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봅시다!!!
# 1학기 7주차(3.30) 수업 공지
1)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2부 9장(352p)까지 읽어옵니다. 7주차 발제는 1조 수빈샘, 2조 승연샘, 3조 지민샘께 부탁드려요. 공통과제는 금요일 오후 8시까지 올립니다.
2) 7주차 팀별 비평 발표가 있습니다. 발표시간 20분에 잘 맞춰서 준비하시기를요. 바쁘시겠지만 영화팀 비평 발표 이해를 위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및 주연의 <그랜 토리노> 보고 오기를 추천합니다.
3) 간식-후기-정리는 수빈샘, 순이샘께 부탁드립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시고 다음 주에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따끈따끈한 공지 감사합니다 🙂 저 뿐 아니라 아마 예술, 창작 분야에 있는 분들 대부분이 아마 <쇼잉업>이 영화라기보다는 다큐처럼 느껴졌을 거 같아요 ^^ 나아가 예술 뿐 아니라 어떤 일도 실질적으로 일상 속에서 수많은 우연적 개입과 혼란과 엉킴들 와중에 중단되고 또 이어가고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인공 리지가 초반에는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밀어내고 구분하려고 하다가 비둘기를 떠안고 나중엔 비둘기 돌봄에 진심이게 되는? ^^ 변화가 잘못 구워진 작품도 그 자체로 전시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들로도 잘 드러났다고 느꼈어요. 많은 경우 망쳤다고 생각해서 그 작품은 빼기 마련인데, 인상적이었습니다 ^^ + 저는 <프밤>이 유독 영화처럼 읽히고 있어서 매 장마다 고니 쇼트가 언제 등장하는지 기다리는데 ㅎㅎ 생각해보니 고니를 너무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도 드네요. 이번 장에도 '급진적으로 이기적이지 않음을 취하는 형상'을 지닌 고니가 등장하는데 이를 가능케한 그의 '무한한 열망'이 참 멋지기도 하고 범접할 수 없는 무엇 같기도 하고... 그러했습니다 ^^ 여러모로 바쁘시고 피곤하신데 이렇게 일목 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지글을 보면서 지난 주 읽었던 '감성의 분할' 에 조금은 더 다가간 것 같아 배운 바를 댓글로 남기려했지만 실패. 하지만 "시의 원리는 허구가 아니라 언어의 기호들의 어느 일정한 배열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낭만주의 시대는 진술들과 이미지들의 결정권으로부터 예술을 격리시켰던 분할선과 사실들의 논리와 스토리들의 논리를 분리했던 분할선 또한 흐리게 한다."는 말이 조금은 손에 잡혀서 신기해요. 허구와 사실,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이야기(소문자 역사)와 역사(대문자 역사), 예술을 진술이나 이미지의 결정권으로부터 분리했던 그 경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배우고 갑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