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생-기 세미나 두 번째 텍스트, 엔드류 핀버그의 <기술을 의심한다>가 시작되었습니다. 핀버그는 지난 번 책 <현대 기술·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마지막에 아주 디테일하고 명료한 개념들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번 개괄된 텍스트를 읽고서 본서를 만나게 되니 낫긴 했지만, 다루고자 하는 논점도 방대하고 어휘도 빡빡한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생각과 일상을 건드려주는 지점도 있었는데요. 삐걱삐걱 진행되었던 세미나를 스케치해보겠습니다,
비非본질주의적 반反기술관료주의적 기술철학
<기술을 의심한다>라는 당찬 제목의 텍스트로부터 핀버그는 기술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입장과 그것이 실현하는 시스템을 문제 삼고자 합니다. 바로 본질주의와 기술관료주의입니다.
‘본질주의’란 말 그대로 기술이 오직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퍼져 있고 세상이 취하고 있는 기술에 대해 지배적인 견해이기도 하지요. 가령 우리는 기술은 효율을 추구한다, 기술은 자본 증식에 기여한다,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기능이나 원재료로 환원시켜 버린다 등 기술의 불변적인 본성을 가정합니다. 기술은 문화나 살림이나 예술 같이 ‘의미’ 있는 ‘생활세계’와 구별되는 생리를 갖고 작동하는 ‘자기 논리와 법칙을 가진 합리적 세계’라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본질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기술의 본질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그런점에서 대표적 비판자 하이데거 역시 본질주의자입니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 갖는 대부분의 생각은 그것이 비판적이고 부정적일 때조차도 본질주의적입니다. ‘기술은 중립적이고 그것을 사용하기에 달렸다’라며 상식에 빠져 있든(도구주의), ‘기술은 진보하며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낙관하든(기술결정론), ‘기술은 불순하며 본성적으로 지배에 기여한다’고 회의하든(실체론) 우리는 기술을 그것이 출현하고 작동하는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면서, ‘기술’이라는 것에 하나의 본질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주의는 ‘기술’과 ‘의미’가 존재론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입니다. 핀버그는 이런 사고의 뿌리에 반대하며 기술이 사회 안에서 구성되고 변형되는 역동적 차원(시몽동의 표현으로는 앙상블의 국면)을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기술적 맥락’, “다른 직업과의 관계, 책임, 주도권, 권위와의 관계, 윤리학 및 미학과 맺는 관계 등, 요약하면 의미와의 관계”를 낱낱이 살피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비본질주의적 접근’입니다.
이와 연결되는 다른 싸움은, 본질주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시스템인 ‘기술관료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집니다. 기술관료주의란 전문가만이 기술의 설계와 적용에 유익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전통이나 법 또는 대중의 의지보다는 ‘과학적 전문성’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삼는 다양한 관리체계입니다. 이는 모든 ‘가치’를 ‘사실’로 환원해버리지요. 저희는 그 예를 떠올려보았는데요. 모든 일상적 분쟁과 사업적 가능성을 법률과 수치와 데이터로 평가하려는 시대적 분위기가 생각났습니다. 가령 수라갯벌에 신공항을 세울 때, 그곳의 가치가 멸종위기종 새가 몇 마리 사느냐로 환원되어야만 하는 상황이 여기에 해당될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기술관료주의에서는 대중적인 논쟁은 기술적 전문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합니다. 기술에 영향을 끼치려는 대중들의 현실투쟁이 근본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식인데요, 이는 본질주의자들의 생각과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핀버그는 자신의 책을 관통하는 사회구성주의와 좌파적 비판이론이 기술관료주의의 전제와 싸우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반기술관료주의적 철학을 펼치는 핀버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기술에서 의미로 방향을 전환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등록되어 있는 기술시스템에서 우리의 종속적 지위의 본질을 인식하고 의미 있는 삶과 살 만한 환경을 수호하기 위한 설계과정에 개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본질주의를 벗어나면, 기술은 ‘항상’ 정치적이다.
“비본질주의적 접근은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 일반인들은 기술자나 경영자들보다 기술에 체현된 의미를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경영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더 효율적이라고 보겠지만 기계를 비난하는 노동자들은 그로 인해 작업장에서 숙련과 작업장 권력이 박탈되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다. 환경윤리가 기술에 더 적합할 것인지의 여부는 오염을 발생시키는 사라보다 오염의 피해자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30쪽)
‘기술은 어떤 점에서 정치적인가?’ 이것이 이번시간의 주된 질문이었는데요. 위의 문장은 핀버그의 주장이 확 와 닿는 부분입니다. 그는 본질주의적 태도가 기술을 둘러싸고 형성되기 마련인 지배적 행위자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기술관련 분과학문에 접근하기 쉬운 기술자나 권력자(자본가)는 기술을 아주 평이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배적 행위자’입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불러오는 효과를 ‘생활세계’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소비자나 노동자 같은 ‘종속적 행위자’는 전혀 다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읽었던 주디 와이즈먼이 분석한 영국 타이핑 공장의 사례가 있죠. 자본가는 새로운 기계를 도입합니다. 당연히 효율의 관점이었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났겠죠. 하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기존의 남성 숙련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했고, 더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여성 비숙련 노동자들에 맞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본가와 결탁하여 협상하거나 젠더적 갈등을 유발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장에게는 효율이 높아진 기계로 바뀐 간단한 변화지만 다른 이들, 생활을 꾸려가는 이들에게 파장은 엄청납니다. 저희는 이와 관련해서 키오스크가 도입되는 사건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기계 뿐 아니라 기술의 환경적 영향에 있어서도 상이한 행위자들이 체감하는 문제의 폭은 엄청나게 컸는데요. 가까이에서는 가습기 살균제나 라돈 침대 같은 예시가 떠오릅니다. 과거 산업시대로 가면 미나마타병과 같이 말 할 수 없이 끔찍했던 사례들도 보이죠. 기술관련 분과학문 속 지배적 행위자들에게 심플해 보이는 기술의 진보와 개선은 종속적 행위자들의 생활세계에서는 언제나 소요와 소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소비자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투쟁과 독립연구는 당연하게도 기술의 연구 개발에 영향을 행사합니다. 갈등과 요구는 결국 기계의 도입을 저지하거나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종속적 행위자들이 체험하는 생활세계의 의미는 언젠가는 기술설계에 체화된다.” 따라서 기술을 비본질주의적 관점으로, 총체적인 현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경험적 차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68혁명에 대한 스케치
“학생들은 교사나 간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도전했고,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체계를 운영하기 전에 바로 이런 체계를 바꾸려고 했다.”
“오늘날 학생들은 자신들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점점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경제체제를 더 잘 운영되도록 하는 대가로서 받는, 현재 경제체제의 집행자가 되고 있다.”(5월 혁명 당시의 리플릿 <우리가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74쪽)
‘대학생들은 수혜자들인 것 같은데, 왜 반란을 일으키는가?’ 동현샘의 질문은 핵심을 찔러주었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학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50여년 전의 대학생들은 뭐가 달랐을까요? 왜 자기 이익을 걷어차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할까요? 계급 사다리를 오르고, 스펙을 쌓아 성공하고, SKY캐슬에 입성하는 것이 당연한 목표가 아니었던 걸까요? 사실 저희가 대학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성공입니다. 그 성공은 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골적일지는 몰라도, 지배계급이 되려고 열심히 경쟁하는 것이 저희입니다. 최대한 덜 수고롭고 최대한 더 벌기 위해서. 그 절정으로서 건물주의 모델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요. 그런 저희의 눈에, 기술관료-지배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68혁명에서 대학생들의 불만과 요구는 낯설기만 합니다.
동현샘은 ‘기술자라고 해서 기술에서 소외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하나의 힌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외’ 그것이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대학생이나 중간계급(중산층)은 열악한 환경에서의 노동자처럼 ‘착취’를 당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어쩌면 극심한 소외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과학과 기술 영역은 다른 직업은 물론 과학 기술 내의 다른 분야와도 전혀 소통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연구가 왜 이뤄지는지, 그 지원금을 지급하는 기업은 어떤 이득을 노리는지, 그 연구의 성과가 낳는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효과는 무엇인지 등 자기 연구의 배치와 파장을 이해하는 연구원이나 공학자가 몇이나 될까요? 한마디로 기술자들 역시 앙상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품이고 나사입니다. 노동자 나사들을 감독하고 지시하는 간부 나사에 지나지 않지요. 68년의 대학생들의 반란은 이런 소외를 힘입어 굴러가는 기술관료주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반감이 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대학 내 학습의 위계를 파괴하는 것과 이후에 자신들이 참여하게 될 사회의 위계를 파괴하는 이유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75쪽)
이를 보며 저희는 새삼 부럽다는 생각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진단하고 참을 수 없는 현실을 향해 외쳤다는 점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불만이 생겨도, 가진 걸 잃을까 두려워하며 잇속을 차리고, 홍수 같은 컨텐츠를 소비하며 물러서고 마는 것이 저희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교육 이야기도 했는데요. 사실상 교사들부터가 최고도의 경쟁을 뚫고 승리한 사람들이고, 학교는 끊임없이 위로 치고 갈 것을 주문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샛길을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68의 저 열기는 감동을 남겨주었습니다. “혁명은 그 운동이 국가보다 강력했는가가 아니라 수백만 대중들의 가슴에 현재사회에 대해 돌연히 문제제기를 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행동하게 만들었는지로 정의할 수 있다.”(100쪽)
68에 대해, 그리고 이어지는 70년대 환경담론에 대한 논의의 말미에서 핀버그는 ‘기술’을 문제 삼습니다. 68에서는 문제의식이 ‘반기술관료적으로’ 재정의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환경담론에서는 커머너의 주장이 계급과 사회적 복잡성을 주목하지만 여전히 기술에 대해서는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는 듯합니다. 커머너가 욕망의 문제를 놓쳤다는 이야기도 정리해보았는데요. 다음의 인용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커머너가 갖고 있던 가장 명시적인 문제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계급의식 이론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로부터 그 계급이 미래에 갖게 될 신념을 예언할 수는 없다. 사회이론가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구성된 합리적 계급의식을, 계급이 지닌 실제의식과 어긋나게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커머너는 정치 문화적인 매개요소라는 수준의 2차적 분석을 생략했다.”(134쪽)
다음 시간(3.30)에는 <기술을 의심한다> 2부(147~257쪽)까지 읽고 과제를 적어옵니다.
*이번 시간 과제는 조금 쉽게, 가장 이해되고 와 닿는 인용문 하나를 뽑아두고, 자신의 질문과 생각과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써 봅니다. 구체적인 질문은 추후에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