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무진장(無盡藏)’하게 일요일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사서》와 명리(命理), 이를 아우르는 암송과 단장취의(斷章取義)를 어디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뭐랄까... 생극제화가 잘 일어나질 않네요. 기운이 다른 기운과 관계 맺는 것처럼, 공부와 공부가, 오전과 오후가 연결돼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아마 아직 무언가를 연결할 만큼 쌓이질[土] 않아서 그런 거겠죠?
오행(五行)과 왕쇠강약(旺衰强弱)과 생극(生剋)
지난 시간부터 저희는 오행의 왕쇠강약(旺衰强弱)과 생극(生剋)관계를 배우고 있는데요. 제가 초심자여서 그런가 강의 내용이 흥미롭긴 한데 돌아서면 거의 다 까먹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무엇이 원리이고 예시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몇 가지 앞으로 명리학을 공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가령, 오행이란 ‘사물’이 아니라 만물이 다섯 가지 질서 속에서 운동하는 방식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오행에 대한 공부가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라기보다 표상에 갇히고 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행의 관계를 표현하는 생극도 단순히 좋고 나쁨의 작용이 아닙니다. 수생목에서 수가 제대로 힘을 가지지 못하면, 목 때문에 마르게 됩니다. 그리고 목극토는 단순히 토를 괴롭히는 작용이 아니라 자신의 기운을 현실화하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 속에서 생하고 극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글자들 간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겠죠. 아직 잘 연결은 안 되지만, 주역 공부와도 많이 연관시킬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죠? 아주 흥미롭습니다!
벌가벌가(伐柯伐柯)와 심성구지(心誠求之) 사이의 단장취의(斷章取義) 글쓰기
채운쌤은 지난 시간 《대학》 전 10장의 ‘혈구지도(絜矩之道)’와 이번 《중용》 13장의 《시경》 〈벌가(伐柯)〉편의 ‘칙(則)’을 연결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일단 ‘혈구지도’란 외부의 잣대를 가져와서 타인과의 관계를 헤아리는 게 아니라 자기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용》을 참고하면, ‘혈구지도’는 역량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벌가(伐柯)〉편에는 도끼자루를 쥐고 도끼질을 하면서도 어떻게 도끼질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도끼자루가 어디 있는지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도끼자루를 ‘혈구지도’로 대입하면, 타인을 헤아리는 기준을 자꾸 외부에서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도끼질하는 솜씨가 매번의 도끼질로 드러나는 것처럼, ‘혈구지도’ 또한 당장 누군가를 헤아릴 수 있는 만큼 발휘되고 확인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글쓰기에서 ‘벌가벌가’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다들 단장취의를 열심히 해왔지만, 채운쌤의 코멘트를 통해 각자가 돌파해야 할 지점이 어딘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를 잘못 던진 글도 있고, 생각을 밀고 나가기 싫어 얼른 봉합한 글도 있고, 좀 더 느긋하게 뉘앙스를 다듬어서 발전시키면 좋았을 글도 있었죠. 채운쌤은 화극금 혹은 토생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글들이라고 하셨는데, 뭔지 몰라도 귀에 쏙쏙 박혔습니다. 어쨌든 글쓰기에 집중해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인데, 자꾸 차근차근 하나하나 던지지 않을 때 글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아요. ‘벌가벌가’에서 ‘심성구지(心誠求之)’로 나아가보죠. 나머지 단장취의도 화이팅입니다!
공지입니다.
읽을 책
(1) 《중용》 20장까지
(2) 《음양오행…》 163쪽까지
(3) 《뚜웨이밍의 유학 강의》1부 끝까지입니다.
과제
(1) 10천간의 글자들의 특성과 지장간에 있는 천간의 특성을 정리하기
(2) 암송 범위는 카톡으로 알려드릴게요.
이번 시간의 후기는 은정쌤께, 다음 시간 간식은 영주쌤과 시현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벌써 7주차군요!!
오행을 각각의 성질로 보는 게 아니라 다섯 가지 질서 속에서 운동하는 방식으로 보는 게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웠던 거 같아요!
오행이 어떤 방식으로 생하고, 극하고, 어디를 향하고, 어떤 힘을 받아들이는지 ‘자연’의 운동을 실감나게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ㅋㅋ.
혈구지도 강의를 들으며 저희에게 ‘답’을 찾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을 외부에서 구해야 하는가? 내부에서 구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매번의 시행착오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