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니까야> 6장~8장과 <천사들의 전설> 아침~정오장을 읽고, 전자는 공통과제를 후자는 맡은 부분의 발제를, 그것도 자청해서 하는 세미나 동학들이 모였습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서로 끌어주기도 얹혀가기도 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 과정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붓다와 같이 깨달은 스승께서 정답을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지만, 우리끼리 이런걸까? 저런걸까? 하면서 각자 가져온 자신의 고민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토론에서 풀리기도 아직 막혀있기도 한 현재의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주에도 우리는 이 작업을 즐겁게 하겠지요. 공부하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이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오전 : 붓다의 시간
<디가니까야> 6장 마할리의 경과 7장 잘리야의 경은 연결되어있습니다. 마할리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예가 만딧싸와 잘리야의 질문인 ‘영혼과 육체는 다른가? 같은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장 위대한 사자후의 경은 고행자인 깟싸빠가 고행에 관한 부처의 의견을 묻는 장입니다.
먼저 6장과 7장에 관한 토론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다른가? 같은가?’를 묻는 수행자에게 붓다께서 그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 그 질문이 타당한가를 수행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잘리야는 계속해서 타당하다고 주장하다가 마지막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의 설법을 듣고 타당하지 않다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합니다. 이에 제가 재기한 질문은 타당성을 어떻게 누구의 기준으로 가를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붓다의 말씀에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저에게 미영샘은 “영혼과 육체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자아가 상주불멸하는 것인가 단멸하는 것인가를 묻는 문제와 맞닿아있다. 이와 같은 상견과 단견은 영원하든 일시적으로든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가 있다는 전제하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같다.”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영혼과 육체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 또는 같은지는 이 전제 즉 영혼이나 육체의 실체화에서 비롯되는 질문입니다. 붓다는 영혼과 육체를 실체화시키지 않으면서 수행자의 질문에 답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현실 바닥에서 나오는 질문이라기보다 이름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고통의 문제들과는 먼 것이 아닐까란 의견도 있었습니다. ‘나’라는 집착이 사라지지 않아 발생하는 고통을 문제 삼는 게 불교 수행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은이샘은 “마할리와 유행자들이 부처님의 답변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육체의 절제로부터 정신이 정화되고, 정신작용이 육체 행위에 앞서기도 하고 역으로 조율되기도 하면서,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서로 상응하고 얽혀들면서 서로를 고귀하고 청정하게 만들어 가는지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붓다의 답변은 답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질문자의 전제가 깨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아닐까? 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번에 읽게 되는 <디가니까야>9장에서 더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또 챙챙 소리 나는 토론을 이어가 봅시다.
두 번째 8장 위대한 사자후의 경은 붓다께서 고행을 체험했지만, 지금은 고행을 반대하는 듯하기에 고행자인 깟싸빠가 붓다의 이런 태도가 모든 고행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며 고행에 대한 붓다의 의견을 묻습니다. 붓다께서는 깟싸빠가 말한 고행을 다 실천하더라도 계정혜를 실천하지 않고, 원한과 분노를 여의고 자애의 마음을 닦아서 번뇌 없는 마음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수행자의 길에서 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유행자의 ‘고행’과 붓다의 ‘수행’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우리가 이 장에 관해 충분히 토론하지 못했지만, 민호샘의 공통과제인 수행은 ‘고행보다 어려운 것’이라는 제목으로 붓다의 입장에 대한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 ‘고행’은 장자나 아녀자도 할 수 있지만, 수행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민호샘은 이 부분의 핵심이 ‘감관의 수호’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 같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어려웠지만, <천사들의 전설>에서도 ‘수호자, 수호천사’가 등장하면서 연결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수호한다는 것과 불수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행자들은 ‘시각이라는 것은 차단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시각으로 마음에 드는 형상이 보여져야 한다.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이 보이지 말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붓다는 이에 대해 ‘그들이 어떤 점에서 옳다고 말하여도, 나는 그 점에서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옳지 않다고 말하여도 나는 그 점에서 옳다고 말합니다’(378쪽)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이 감관의 수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우리는 ‘불수호’가 인간을 기준으로하는 분별의 극대화와 관련된 게 아닐까? / ‘수호’는 느낌을 실체화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면서 ‘수호’를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또는 좋음과 나쁨을 떠나라는 것일까? 자신을 투사해서 보지 말라는 말씀일까? 보이는 데로 반응하지 말고 전체적인 관점(연기조건)으로 보라는 것일까? 등등 많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감관의 수호’라는 주제는 우리를 유혹하며 이리 저리로 이끄는 요소들이 더 많아진 것 같은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윤리가 아닐까요? 이에 관한 사유가 시급합니다.
오후 : 세르의 시간
<천사들의 전설>은 붓다의 말씀보다 더 우리를 모호함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이 모호함을 힘껏 안아 모두 발제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모호하지만 모호한 만큼 우리가 발제하고 싶을 만큼 매력이 터지는 세르의 <천사들의 전설>입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가 접속하기에는 어려울지라도 그가 선택한 그림과 사진 그리고 그 그림과 사진 옆에 있는 세르의 해석은 우리를 들뜨게도 눈물짓게도 합니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지요. 모두 공감한 매력 지점은 이번 마리아와 대천사의 만남을 그린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입니다. 마리아와 천사의 시선의 방향, 무지개 빛인 천사의 날개, 천사와 마리아의 팔과 손동작 등에 시선을 두게 만드는 세르의 그림 설명은 세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습니다. 라니샘은 이 세르의 설명에 따라 이 그림을 보고 ‘겸손이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고 그곳에 소식이 찾아든다’라고 보셨습니다. 그림을 이토록 다르게 보이도록 하다니요.
세르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통해 어떻게 ‘나’가 되고 ‘세계’가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다리라기보다 원근법적으로 보이는 삼각형처럼 보인다는 즉 위계적 구도처럼 보인다는 피아(주인공)의 말에 민호샘은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원뿔도식을 떠올렸습니다. 뒤집은 원뿔은 위계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마주침(꼭지점)에 외부의 평면과 과거 전체가 관계함을 보여주는 도식이기 때문입니다. 세르의 ‘수호천사’는 우리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천사라기 보다 우리에게 생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수호(자)천사는 기존의 습관을 중지시켜 경로 변경의 기회를 만드는 중개자(전치사)입니다. 세르가 수호천사라 칭하는 것에는 카드 사기꾼, 무언극 배우, 카드 한 벌, 화가의 팔레트, 검은 구덩이, 음악과 춤, 전치사, 천사, 백과사전의 화신, 원형 기관차 플랫폼, 기생자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수호천사인지 상상할 수 있나요? <천사들의 전설>을 한 번 보십시오. 세르의 통찰에서만 이들은 수호천사가 됩니다. ‘푸토’는 아기 천사입니다. <천사들의 전설>에서 피아의 조카이자 아이인 앙젤리크가 나옵니다. 앙젤리크는 이름대로 천사입니다. 어디로 이끌지 모르는 작용을 합니다. 세르가 ~의, ~에는 등 천사들 칭하는 전치사는 많습니다. 천사들은 아직 소년도 소녀도 동시에 소년소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성도 아닙니다. 백색에 가깝다고 합니다. 세르는 천사를 어떤 존재로 소개하고 있을까요? 전치사로 소개하는 천사들은 모든 현존의 선구자입니다. 모호하고 어렵죠? 뒤를 더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침이 지나가면서 정오의 종이 울리지요. 이제부터 세르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이 시공간(현존)에 초점을 맞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세르의 통찰이 기대됩니다.
7주차 공지 : <디가니까야> 9장 10장 – 공통과제/ <천사들의 전설> 오후 각챕터 발제, 질문/ 7주차 간식,후기 민호샘
오전에 감관의 수호와 불수호에 대해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지요. 세르의 수호천사에 대한 부분을 읽고 어떤 연결점을 찾고 싶었던거 같아요. 아무튼 목요일은 '지혜와 헤르메스' 도반들이 나의 수호천사들입니다.^^
다시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군요... 묵직한 <디가니까야>와 커다란 <천사들의 전설>을 펼쳐 놓고, 감관의 수호처럼 익숙한 말부터 수호천사-원형교차로처럼 난해한 용어까지 텍스트 구석구석을 의문에 붙여보는 목요일의 세미나가 아주아주 유익합니다!! 흘러나온 이야기들이 휘발되지 않게 보자기에 잘 챙겨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후기 읽으니 지난주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거 같습니다. 디가니까야의 반복되는 구절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발견하고 세르의 은유적 표현을 해독하는 재미가 쏠쏠한데요. 요즘은 이 두 테스트가 일상의 번다함 속에서 휴식처같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쭉 공부인 듯 공부 아닌 듯이 일상을 채워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