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신곡 천국편을 끝까지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간 뒷풀이 자리에서 은옥샘이 이번 기회 아니면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읽게 되어 좋다고 하셨는데요. 정말 이번 기회가 없었다면 신곡을 끝까지 읽을 일은 없었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흥미진진해서 놀라기도 했고요. 천국편의 이해가 어려워 우리의 자리는 지옥이라 그런갑다~하며 웃기도 했는데, 세미나 시간을 돌아보면 이리저리 질문하며 나름대로 이해에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합니다.
앎과 믿음
그들은 단지 믿음 안에서 존재하고, 그 믿음/ 위에서 높은 소망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믿음을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논리적 증거는/ 이런 믿음 위에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은 논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24곡 73-78)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실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믿음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을 실체“라고 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보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믿음이 생기는 것인지, 그것들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질문하기도 했고요.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오갔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빛을 본 적이 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라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봄과 앎과 믿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작동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습니다.
봄(見)
천국에서 단테는 빛을 봅니다.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한 빛을 보지요. 단테는 왜 믿음의 행위이자 지성적 행위를 본다는 행위로 표현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본다는 행위에는 대상을 본다는 능동적 측면과 대상이 보여졌다는 수동적 측면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느님의 의지, 선에 해당하는 빛을 볼 때에도, 우리가 하느님의 의지에 가까워지려는 의지를 능동적으로 발휘해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 빛이 보여져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게 되지요. ”사람의 의지는 언제나 잘 피어나지만,/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싱싱한 자두를/ 약하고 썩은 열매로 만드는 법이지요“(27곡) 라는 구절에서는 사람의 의지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을 볼 때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을 향한 의지와 은총으로 생겨“난다는 속성을 다 담아내기에 ‘봄’은 적절한 듯 합니다.
단테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
천국편에서 단테는 자신이 본 것을 말로 담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합니다. 담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지, 단테의 비전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단테는 담을 수 없는 것을 글로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의 섭리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신의 섭리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인 듯 합니다. 단테가 처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번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 번뇌가 단테 여정의 시작인 지옥으로 묘사됩니다. 연옥은 그 번뇌의 과정을 보여주는 자리, 천국은 번뇌의 자리에서 살짝 옮겨난 자리라고 할 수 있는데요. 번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잠시, 찰나의 시간 동안 그 번뇌의 자리에서 살짝 옮겨간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빛의 깜빡거림“이라고 묘사한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천국을 정의가 실현되는 장소라고 한다면, 불의한 곳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천국편에서 지상의 불의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단테의 비전을 무어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 번뇌의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단테의 자리가 옮겨갔다는 점이 주는 울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울림이 시를 쓰는 단테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몸이 상하고 야위었음에도 계속해서 쓸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내용을 담은/ 이 거룩한 책을 쓰는 오랜 작업에/ 나는 몸이 상하고 야위었다.// 한 마리 양으로 자라는 동안 나를 감싸 준/ 포근한 우리 밖으로 추방한 저 잔악한 마음들, 내게/ 싸움을 거는 늑대들에 이 시로써 승리를 거둔다면,// 나는 변한 목소리와 또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례를 받은 샘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25곡 1-9)
말로 다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담아내고자 했던 단테, 그의 여정을 우리는 무엇으로 볼 수 있을지 에세이에 잘 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애써보아요!
봄에 있어서, 본다는 능동과 보여진다는 수동으로 나눠서 보통 생각했는데요. 신곡에서는 보여진다는 것을 수동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보여진다는 것은 신의 계시로서 어쩌면 보는 주체보다 먼저 그것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요. 신의 계시라는 보여지는 것 없이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럴 때 보여지는 것을 수동성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하기 어려운데요. 수동적인 존재를 넘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건지 알고싶지만 상상이 안 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