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시대」 4주차 후기/ 2024.03.24./ 장청
우리에게 가정은 무엇인가. 부르주아 사회가 말하듯 가정은 행복과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 그리고 안전한 삶을 보장해주는 곳인가? 13장 “부르주아 세계”를 읽으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어쩌면 가정은 부르주아 세계의 모순과 위선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아닐까. “가정에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문제성과 모순이 망각될 수 있었고 인위적으로 배제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만 상층계급적인 행복이라는 환상을 지켜나갈 수가 있었다.” 가구와 소파, 커튼, 카펫, 쿠션 등 집치장에 필요한 온갖 장식물은 실용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쌀수록 부귀와 지위를 표현하는데 유효하다. 물건은 “인격의 표현이자 부르주아의 이념과 현실로서 인간을 변혁시키기까지 하는 것” (443) 외적인 美를 중시하는 만큼 물건은 오래갈 수 있도록 ‘실한’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튼튼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중성은 부르주아 세계의 물질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날카로운 분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444) 기에. 물질과 정신의 이중성이 내면화된 사회에서 도덕과 욕망 간의 괴리가 메워질 수 없이 클수록 인간 사회는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의 이중적 위선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섹스이다. 미혼 여성에게는 순결을, 기혼 여성에게는 정숙을 요구하면서 기혼 부르주아 남성의 바람기는 얼마든지 용인된다. 부르주아의 성도덕이 허위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윤리는 모든 계층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지만 “유혹과 금욕의 예외적 결합”은 강력한 성적 요소를 발현시켰고 욕망을 강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만큼 성윤리 기준이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병적일만큼 성 윤리를 극단적으로 주장했던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경제 문제와 관련된 요인이 크다. ‘가족’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적 단위이자 재산 및 기업의 기본적 단위로서 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여성은 플러스 재산 (결혼 지참금)의 교환제도에 의해 다른 가족 단위와 연결되는 다리 구실을 했다. 가족 단위를 지키기 위해서 무절제한 육체적 사랑은 금해야 한다. 무절제한 육체적 욕구는 부부 사이를 갈라놓아 가족 단위를 약화시키고 이는 공동의 자산을 낭비하는, 경제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성의 금기는 방종과 일탈로 은폐되기 마련. 가정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성적 향락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것이 부르주아 성의 모순과 위선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옷차림이나 주택 외관을 꾸미고 보여지는 이미지에 집착했던 건 그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물질적 부였기 때문이다. 출생, 신분과 무관한 이 집단이 사회에서 이 시대의 嫡子임을 실증할 수 있는 길은 노동하지 않고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재력의 과시인 것이다.
부르주아 가정의 모순과 위선은 결혼한 남녀 간 위계질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성은 가정의 천사, 꽃이 되어 가족을 기쁘게 하고 맛있는 음식과 옷을 대령함으로써 가정이 사회라는 전장터에서 돌아온 전사들의 휴식처가 되기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야 하는 장소였다. 홉스봄은 이와 같은 부르주아의 가족 구조가 사회구조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배치라고 지적한다. 부르주아들이 봉건제의 종속적인 신분제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불평등한 구조적 문제가 부르주아 가족주의 속에서 가부장적 독재로 오히려 더 강화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자유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종속은 봉건제의 집단적· 제도적· 전통적인 불평등보다 개인적 관계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한다.
19세기는 과학의 시대였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를 지식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자랑삼았고 모든 분야의 지적 활동을 과학에 종속시키려 했다. 콩트의 실증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는 철학을 과학에 종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콩트는 인류가 거쳐야 하는 단계에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과학적 단계들- 여러 단계가 있는데 최종 단계가 자유주의라고 했다. 그러나 홉스봄은 이 시기(1789~1848)가 사회적· 과학적으로 결코 혁명의 시대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왜 그런가. 지식과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나아가고 도달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지적, 실천적 방법에 관하여 중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세기를 20세기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 실제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던 건 명백하다. 특히 물리학 이론에서 극적인 발전이 있었는데 “열과 에너지라는 별개의 현상이 열역학 법칙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생물학에서 가장 극적인 진보는 진화론의 발견이다. 생물학은 생명의 메커니즘과 관계가 없는 이론을 전개하여 인간 사회를 생물학상의 진화의 법칙으로 환원한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했다. 자연과학을 인문 사회 과학과 결합시켜 이론화한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숭이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유전적 자연선택설에 의해 단계적으로 진화해왔다는 주장을 폈다. 그것이 사회다윈주의다. 이와 같은 인종주의적 인류학을 근거로 한 인종주의는 백인은 우월한 종, 그 외 타인종은 생물학적· 사회· 문화적으로 진화의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열등하다’는 것이다. 종의 우열 논리는 진화론적 역사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전제 위에서 성립된 것으로 인종주의에 기반한 생물학과 인류학은 19세기 과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정치학의 산물이다. 이처럼 19세기 과학은 진보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기여했다.
그렇다면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사회의 예술은 어땠는가. 이 시대는 “예술의 종교화” 즉 예술은 종교의 대체물이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천재’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시대 천재란 “개인 기업이 비경제 사회에서 발현하는 형태를 대표하는 것”으로써 물질적 성공을 보완하고 ‘이상’보다 정신적 가치를 대표하는 존재, 즉 당시 사회는 예술이 물질주의적 문명에 대해 정신적 내용을 불어넣는 공급기능을 다해주는 존재이기를 요청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따라 군주와 귀족 사회에서 기껏해야 궁궐의 장식품을 당당하거나 귀족들의 사치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중꾼에 지나지 않았던 예술가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어 귀족의 작위에까지 올랐다.
이 시대 예술의 혁명은 예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술품 시장이 엄청난 규모로 날로 커져만 갔고 예술품이 대량으로 사고 팔려나갔다. 부자들은 예술품 수집에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며 사들였고 기계에 의한 대량의 복제 기술이 가능해지면서 산간벽지 하층민들의 오두막에까지 유명 화가의 복제된 그림이 걸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 시대에 출현한 ‘사실주의’는 이전의 그림처럼 사물을 대상화하거나 공상 속의 세계를 이상화한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한 민중의 ‘현실’과 ‘생활’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장과 타협한 예술가들은 고객들이 원하는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빈곤과 착취, 불결한 현실을 표현하기보다 부르주아 계급이 갈망하는 보다 나은 창조의 세계를 그렸던 것. 이 시대 예술의 특징은 작품의 내용보다 표현의 기법에 심혈을 기울였다. ‘과학적’ ‘실증적’ 사실주의로 화한 예술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던 인상파가 주목을 받은 것은 기법상의 혁신때문이었다.
이를 새로운 예술의 국면, 이를테면 예술의 진보라고 하는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때의 예술의 진보란 새로운 전통의 변혁이 아니라 종래의 기법을 개선한 것에 지나지 않는 변화, 기술혁신을 의미했다. 이제 예술은 부단히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탈락을 면할 수 없게 된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낯익은 것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전위예술, 이는 “부르주아 사회와 지적으로 상호모순되지 않는 예술을 창조하려는 기도가 좌절”(554)된 속에 새롭게 시도된 창작물이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가정’을 배우면서, 우리 시대의 ‘가정’과 많은 점이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네요!
외관은 볼품없는 아파트지만, 그 내부를 화려하고 고급스런 물건들로 채워넣으려고 하는 욕망이나
가정 바깥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가정 내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으려는 욕망이나
경제적인 관계로 가정이 묶여 있다는 점이 지금 우리 가정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19세기 예술이라하면 우리 현대성에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았는데요, '과학과 기술, 자본이 분출되는 시대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했던가' 라는 것이 고민이 되었을 것 같아요. 사실주의(리얼리즘)가 한편으로는 빈곤과 착취 속에서 민중의 일상을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와 동일한 모습을 띠는 부르조아의 시장적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늘 이해할 수 없는 아방가르드, 전위예술도 그 맥락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청샘~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