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 노장 읽기 6주차 후기 및 공지
후기가 늦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단정하지 않은 것이 때가 그래서인가 핑계를 대 봅니다. <도덕경> 읽기가 후반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엔 강의가 없어 처음으로 <해체론> 텍스트 토론 시간도 가지고, 끝나곤 산책(?)삼아 떡볶이도 먹으며 공부의 즐거움과 팀노장의 든든함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나눈 얘기들이 가물거려 큰일이네요. 제가 지난 시간 들었던 생각들을 나눌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學과 知를 말하는 은유적 방식
도덕경에는 知가 道만큼 많이 나옵니다. 우리도 거의 매시간 知를 주제로 한 과제가 한두 편은 올라오고 있지요. 그런데 노자가 앎을 말하는 방식이 독특한 것 같은데요, 노자는 우선 학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고 하고(絶學無憂), 배우지 않음으로 배우라고도(學不學)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펙이나 자기계발을 위해, 입신양명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은 앎의 영역이 아니라고 봅니다. 48장에는 학문은 하루하루 더하고 도는 하루하루 덜어낸다(爲學日益爲道日損) 고 할 때, 익과 손으로 학문을 말하지 절학의 의미는 아닌 것이죠.
知에 대해서도 두 가지 언어가 혼재합니다. 이번에 읽은 47장에서는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아는 자(不出戶知天下)를 말하고, 10장에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게 무지로 할 수 있겠는가?(愛民治國能無知乎) 33장에서는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다(知人者智自知者明)고 하죠.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보여지죠. 그런데 알기를 그치면 위태롭지 않다고도 하지요(知止不殆) 이런 말들이 노자를 읽는 데 혼란을 가져오고 우리가 소신껏 논지를 펼치는 걸 주저하게 만들고 있지요.
유학과 비교해보면 호학(好學)으로 자신을 표현하신 공자 이하, 자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학문을 중심에 두는 것이 사대부입니다. 규창이는 유학이 그런 면에서 담백하다고 표현했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절학(絶學)과 호학(好學) 사이가 그렇게 멀까, 대립적일까 라는 지점에선 의문이 있습니다. 둘 다 “좋은 세상”을 바라고 있습니다. 소국과민과 평천하라는 지향점이 달라보이지만 개별자들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유사하다는 거죠. 단지 유학
은 그러기 위해 더 공부하자,를 모토로 한다면 도덕경에서는 절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知止/ 知足/ 知常/ 知古始 등이 그것입니다. 지난 시간 유학의 인, 의, 예가 덕을 잃으면서 오히려 출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이 논쟁이 도덕경을 읽는 내내 우리를 따라오겠죠. 저도 이번에 노자를 읽으면서, 분명 지향점이 분명해 보이는데 언어는 반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점에서 오래 헤매고 있는데요, 이게 노자식의 은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孩之, 매 번을 다르게 겪는 무위지치
이번에 윤순샘의 글은 저희를 웃음바다로 몰아넣음과 동시에 무릎을 치게 만들었어요. 성인의 무위지치를 아이를 다루는 살벌한 현장으로 설명해서인데요, 노자의 주요 개념 중 하나가 영아(嬰兒), 적자(赤子) 해(孩) 같이 어린아이에 도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49장에서는 성인의 마음은 항상하지 않다(無常心)고 합니다. 항상함을 아는 게 知(知常)라고 했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성인은 모두를 어린아이 다루듯(
孩之) 해서라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기가 쉽지 않은데, 말로 되지 않아서예요. 아이들은 말 대신 알 수 없는 울음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왜 우는지를 매번 알아내야 하는 게 아이 키우는 사람의 기본이 됩니다. 기저귀인지, 배가 고픈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그걸 알아차리는 것의 어려움은 물론, 아무 때나 자고 깨기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계속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육자의 계획(常心)은 번번히 무너집니다. 한 명으로도 정신을 쏙 빼놓는데, 성인은 양육해야 할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모두입니다. 성인이 무상심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지 뭡니까. 중년들의 전폭적인 공감이 있었죠. 전 이번에 도덕경의 글자 한 자 한 자가 너무 세심하게 골라진 것에 놀랐는데요. 영아나 적자를 써도 되는데 굳이 孩라는 글자를 쓴다는 거죠. 글자 모양도 겹겹이 쌓여 있듯이 중층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내용에 딱 맞는 글자를 가져온 겁니다. 39장의 昔자도 옛날을 뜻하는 古로 써도 되는데, 글자를 바꿈으로써 다양함을 글자에도 담으려고 하는 것 같아 글쓰기의 정밀함을 새롭게 보였습니다.
해체론과 은유
<해체론>의 이번 주 주제는 은유입니다. 은유는 에세이 주제 중 하나인데요, 데리다는 은유를 철학사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주요 요소로 은유를 본다는 것과 ‘은유 모방 진리’가 함께 말해지는 게 흥미로웠는데요, ‘은유 모방 진리’는 ‘유사성 혹은 동일성이라는 공통된 내용을 지반으로 하고 있습니다’(256쪽) 이 관계성을 보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은유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발제문)입니다. 다른 사물로부터 이름을 차용하는 것이죠. 이런 대체와 전용의 가능성은 은유적 관계에 놓은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에서 비롯됩니다.(245) 이 유사성을 간파하는 것이 ‘은유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은유를 통해 사물은 재정위 됩니다. 은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유사성이 중복되기 때문이죠. 우리가 노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그런 지점이고요. 데리다가 은유를 언어와 관련해 정의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은유는 누군가가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거나 잠복해 있는 그런 사상을 언술을 통해서 표현한다고 가정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254)고 말합니다
모방은 은유와 말했듯 유사성 혹은 동일성이라는 지반을 관찰한다는 면에서 개념이 중첩됩니다. 은유가 지속적으로 미끄러진다고 느끼는 것은 은유가 제공하는 지식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대상과 은유 사이 일탈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은유는 논리적 표현과 여타의 표현 사이에서 중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259) 때문이죠. 그래서 의미와 비의미, 진리와 비진리가 동시에 가능한 언어유희처럼 보이게 됩니다. 은유는“모방의 기회이자 함정”이다.(260)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입니다. 은유와 모방은 진리를 발견하고 진실을 표현하는 새로운 사유 패턴으로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내적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철학은 은유적 사고의 총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은유가 진리를 정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데리다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이라고 보고 ‘남유’이론을 도입합니다. 남유란 ‘의미론적 대체의 틀을 벗어나는 과도한 비유’(288쪽)를 말하는데, 남유를 통해 기호의 외연이 확장되고 돌발성이고 탈규칙적인 강제력이 생겨납니다. 저희의 토론은 남유를 맴돌다 끝이 났는데, 은유와 남유 사이 많은 철학사적 다리들이 있었습니다. 데리다는 남유의 개념을 해체론의 하나로 가져왔는데, 비틀기, 기호의 생산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흩어지고 없지만 해체론이 텍스트를 읽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주는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에세이가 다가오고 샘께서 에세이 주제를 주셨지요. 그걸 이제 올리는 게 문제이지만 에세이 주제를 보고 마음으로 정해보시기 바랍니다.
* 에세이 주제
- ‘해체’ 개념을 최대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덕경>을 해체적 사유로서 해석해보기
- ‘은유’ 개념이 내포하는 언어의 문제들을 바탕으로, <도덕경>의 글쓰기에 대해 논하기
*다음 시간(3.27) 공지입니다.
-<신노자독본> 55~63장까지 읽고 공통과제로 쓴 장을 외워 옵니다.
-<사유하는 도덕경> 55~63장까지 읽고 한 장을 선택해 공통과제를 적어옵니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 5장 ‘해체론적 은유론의 계보’(292~314쪽)를 읽어옵니다.
*발제는 정옥
*간식은 민호
성인의 이미지를 새롭고도 강렬하게 살펴봤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보면 남유는 <안티오디푸스>의 첫머리에 나오는 분열자 렌츠의 산책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