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xx주의’는 이미 위험과 어려움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공동체나 조직이 끝까지 일관되게 그 주의의 이념이 표방한 슬로건을 향해 나아가기는 어렵다는 것. 그 내부를 구성하는 수많은 인자가 일치와 조화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 나라는 주체가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경도되어 주체적으로 따른다 해도 나라는 변함없는 주체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아’다르고 ‘어’다른데 그 이념이나 사상을 창안한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 그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인지? 그런데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의지하고 따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속았다 뒤통수를 맞았다 저들이 변질했다는 둥 하며 좌절하고 주저 앉거나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갑니다.
고니는 규정된 모든 것들 밖에서 살면서 자신의 원리에만 충실합니다. 생시몽주의자들과 함께 있을 때도 그는 연합이 내건 구호나 사랑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세계를 사는데, 그 세계는 어떤 공간에 머물지 않고, 어떤 이념에도 머물지 않는 장소입니다. xx주의와 다르게 영토를 점유하지 않는 장소. 랑시에르는 그를 다른 세계라는 원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타협 없이 ‘절대적’인 것을 향해 끝까지 밀어붙이는, ‘진보와 모순되는 어떤 절대자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신발창이 닳도록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유도 절대적인 독립을 위해서지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고 급진적으로 이기적이지 않은 그가 하나 붙든 것이 있으니 도덕-무한한 선함-이라는 것입니다. 들라포르트처럼 어줍잖게 라도 개념을 규정하고 경계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일반인이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 신우샘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봅니다. “여기서 ‘선함’은 착함이 아니라 무한하게 ‘좋음’ 또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다. 무한이란 어떤 조건이나 전제가 사라짐이다. 노동과도 시와도 분리되지 않는 역량은 고된 노동의 실존에 대한 냉철한 인식–용납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예속-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를 빼내려는 불가능한 운동으로 발휘된다. 어떻게? 자신을 예속하는 고통스런 노동에서도, 다른 실존의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도 무한한 좋음과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이율배반적인 시도”로.(덕분에 감이 올랑말랑합니다) 이것이 이상에 사로잡힌 것이건 망상이건 그러한 시도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던 고니는 대문자 역사 안에 존재하는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랑시에르가 불러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었던 노동자 일반 속에 묻힌 그저 일반 사람이었을. 고니가 될 수 없었던 많은 빈곤한 노동자가 생시몽주의 연합으로 기대를 안고 합류합니다.
우리 조에서는 빈곤한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개별적 빈곤과 사회적 빈곤. 어쩌면 빈곤을 보는 시각이 자비와 구제로 해결해야 하는 개별적 빈곤에서, 생산 능력과 그에 따른 보상에 의한 사회적 빈곤 타파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달라지면서 생시몽주의도 사회도 자본주의와 행보를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개인의 세세한 문제보다는 거시적 사회 문제 해결이 선결 과제가 되는 사회로 전환되었습니다. 나연샘의 “연합이라는 자유주의적 해법은 ‘세부’를 자유화 시켜주지 못하고 ‘일반성’을 자유화시키는 것에만 잘 작동한다.”는 문장처럼,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우리 사회에서 빈곤문제와 같은 소소한 개인의 문제는 사회문제 일반으로 뭉뚱그려지면서 사회적 해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우리 조에서는 생시몽주의는 여느 xx주의처럼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의 경우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숨겨진 정체를 ‘심하게’ 추적하느라 우리 조원들이 고니의 삶을 더 깊이 드려다 보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던져주는 텍스트입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해 보는 것도, 그들을 통해 랑시에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보는 것도 도무지 쉽지가 않습니다. 해야 할 과제가 많다 보니 후기 쓰기도 쉽지 않네요. ㅋㅋ 그렇지만 채운샘은 우리가 잘 해내고 있다고 하시니, 샘의 ‘생각보다’ 잘해 내고 있다의 의미인지, 독려를 하고 계신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일단은 믿고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까지 힘을 내어 봅시다.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으면서 어떤 주의, 그리고 일어난 현상과 사건에 관하여 배치와 맥락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 꼼꼼하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고니의 말이, 고니의 삶이 저에게 울림을 주고 있는데, 이것 또한 고니적인 맥락과 시대적 상황에서 봐야 할 것이며, 이걸 교리화하면 안 되겠죠? 공부할 때 철학자를, 책을, 스승을 정답이나 신격화하기 참 쉬운데요. 이는 우리가 좀 더 깊이 만나고 사유하는 건 힘이 들기에 정답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랑시에르의 글은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는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텍스트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토론도 풍성하고 사유도 더 깊어지네요.^^ 조별 토론할 때도 날카로운 질문과 깊이 있는 해석이 조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핵심적인 내용을 잘 정리한 후기 감사해요.👍😊
샘 후기를 보니 저는 여전히 랑시에르에 대한 해석과 생시몽주의자를 규정하는데 집착하느라 텍스트에서 저에게 의미되는 지점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좀 더 자유롭게 만나기를 다짐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산푸른샘의 후기 덕에 1조 토론을 흥미롭게 읽었네요 ~ ^^ 조직이나 연합이 그 구성원들 개인이나 그들의 개별적 문제들과 부딪히는 지점이 어쩌면 태생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순이 있냐 없냐 어떤 공동체가 계속 가느냐 와해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갈등은 무조건 나쁘고 무조건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문제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도 들고요~ "고니의 이율배반적인 시도"라고 쓰신 부분이 이번 주에 읽는 내용과도 약간 연결되면서, 꿈을 꾼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현실을 산다는 것과 꿈을 꾼다는 것은 왜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될까.. 어쩌면 무엇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현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사실은 고니만큼 충분히 '급진적으로' 열망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 (ps. 샘이 추적하신 생시몽주의자들의 숨겨진 정체가 갑자기 급 궁금해지네요 ㅎㅎ 🙂 산푸른 샘~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정성껏 후기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샘이 '심하게' 추적하신 생시몽주의자들의 숨겨진 정체 덕분에 이야기거리가 풍성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공부의 묘미는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와중에 있으니까요. 랑시에르의 문장을 읽다보면 쌈박하게 이해되지 않는 와중에도 '존엄한 인간의 형상'이 첫새벽의 샛별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느낌이 듭니다. 벅참을 느끼죠. '급진적으로 이기주의적이지 않은' '무한한 선함'을 열망했던 고니를 '심하게' 추적하고 싶은 '나니'도 무더기로 밀어닥치는 과제에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푸른샘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