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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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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미나 시간에 채운쌤께서 에르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를 읽는 도움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1. 니체도 모르는데, 왜 니체 세미나에서 데리다와 니체를 엮어 풀어낸 책을 읽고 있을까요??
니체는 매우 다양하게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가운데에도 니체의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철학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니체의 글은 문학으로도 심리학으로도 철학으로도 예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는 다른 각도에서 니체의 글을 읽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해체된 니체를 읽어본다는 것은 우리 또한 니체의 이야기를 또다른 방식으로 해체해볼 수 있도록 인도할수도 있는 책입니다!
2. 채운쌤 강의 요약
2-1. 니체 글쓰기는 <도덕의 계보>와 같이 논문적으로 글을 쓴 경우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과 같이 단편적으로 글을 쓴 경우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니체가 사유의 파편들을 던지는데, 어떤 것을 주워서 퍼즐을 맞추느냐에 따라 가면을 쓰고 달라지며, 니체 자신 또한 “진짜 니체”에 대한 “상”으로 따르는 ‘사도’를 경멸했다고 해요. (예수그리스도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교리화하고 독트린 삼지 않았고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그를 따르는 추종의 무리들이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신”을 만들었다는 점도 말씀해주셨어요~)
니체의 유언 또한 “니체를 읽은 자들은 니체를 떠나라.”고 했을 정도 였는데, 니체를 잘못 읽은 몇몇 사람들은 그의 글을 교리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서, 니체가 그토록 경계하라했던, 나의 니체, 내가 아는 니체를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고해요. 니체가 무엇을 이야기 했고, 어떤 체험을 시도하게했느냐는 중요하지만, 니체의 사도가 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니체와 접속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니체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라는 물음을 품으며, ‘실존으로 살아’가며 ‘자신에게 니체는 왜 필요한가’를 가지고 공부해야하겠지요?
2-2. 니체의 강점은 주류의 철학에서도 다루어질 수 있으나, 철학 바깥의 영역, 비철학의 영역, 학문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또다른 방식으로 니체를 바라본 책이 이번 < 데리다-니체, 니체- 데리다>입니다. ‘데리다’에서 ‘니체’, ‘니체’에서 ‘데리다’로 향하는 방식을 보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니체’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는 책입니다. <아침놀> , <즐거운 학문> 등은 단편적 글쓰기를 했는데, 철학이 어떻게 문체와 연결이 되는가? 그 지점을 데리다가 잘 활용하였다고요.
2-3. <데리다- 니체, 니체- 데리다>의 차례를 보면, “1장 하이데거, 2장 데리다, 3장 니체, 4장니체-데리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데리다에게 변곡점을 부여해준 하이데거로 시작합니다. 데리다는 니체를 ‘형이상학“의 끝으로 보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정말 니체가 서양의 형이상학의 끝’인가?라는 물음을 파헤칩니다.
데리다는 글쓰기의 문제, 기호의 문제, 언어의 문제를 통해 어떤 철학이 깔고 있는것들을 파헤치는데, 그것이 ‘해체’입니다. 분해하는 것이 아니며, 비판도 아닌, 어떤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는가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무언가를 하나로 묶고자 하여, 일관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쳐내고 싶어합니다. 데리다는 일관된 것들로 환원되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그런 부분을 끄집어 내고, 주목하도록 ‘해체’하였습니다. 정밀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해체”인 것입니다. 따져묻다보면 티끌도 보이고, 티끌에 대해 이야기 하다보면 보통사람이 이야기 하던 것과 다른 것이 됩니다. 근본적인 차원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자기 생각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이 가지고 있는 균열, 말한 것 중에 미처 말하지 않은 어떤 것을 찾아내어, 전제를 깨면서 다른 지평으로 열어버리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의 말년의 글은 번역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는 단어의 스펠링을 바꿔, 원래 단어와 비껴내는 글을 지었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게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답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철학을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으로 본 것에 대해 비판했는데, 그렇게 체계와 통일로 철학에 접근한 하이데거는 결국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이끌어갑니다. 그렇게 글쓰기가 다른 것은, 글쓴 사람의 사유가 다르다는 의미이지요.
그에 반해, 데리다는 니체의 총체화되지 않고 벗어나는 어떤 것의 지점을 봤습니다. 우리는 보통 벗어나는 것을 못 견디는데, 그는 그 욕망과 싸우며 사유한 사람입니다. 대화를 나누면 합의점을 도출하려는 습성이 사람에게는 있는데, 뭐가 다르지에 주목하는 것을 해체론의 특징이며,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니체 읽기의 하나의 방식에 대해 배우는 것는 것입니다.
2-4. 여러 시대에 해석되는 니체가 달라질 것이고, 그 해석자 중의 하나가 우리입니다.
’니체는 자신의 텍스트가 말세론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읽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라 합니다. 종말은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니체는 자기 철학을 완성으로 읽히기를 원치 않았고, 다른 방향으로 분산하고 이산시키는 사람이자, 중심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하여, 종합을 벗어나는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래의”, “ 다가올” 세기의 철학자들에게 이야기하는데 니체는 과거의 철학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고, 지금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이미 작동하고 있지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는 책 제목에서 볼 수 있지만, 니체는 니체를 독해할 누구인지 알지못하는 사람을 대화 상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21세기가 니체를 필요로 하는 연결고리가 많음은 분명합니다.
니체는 자신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독자들이 끄집어 내주기를 바랬습니다. ”탈영토화“할 역량이 큰 그의 책은, 오해를 해도 상관이 없는 책일 수 있습니다. 우린 니체가 아니며, 우리의 언어와 니체의 언어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니체의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님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읽던, 원래의 뜻이 무언인가는 없습니다. 지금의 언어로 내 문제 의식 속에서 독해해 가며 가야하는 것인데, 그것이 니체가 말한 ‘미래 철학’, 즉 누구인지 모르는 독자들에게 말거는 철학입니다.
2-5. 니체는 문학에서 더 부합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니체가 어떤 문제에 대해 답을 주지 않고, 벗어날 수 잇는 힘을 주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체험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니체이고, 그렇기에 이렇게 부활한 것입니다.
니체 철학은 문학이라 심리학이라 철학이라 해도 좋을 만큼 어떤 갈라진 학문이라 할 것들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경계를 벗어나는 어떤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정리하기 좋아하는 욕망과 선을 넘어가고 싶은 욕망이 모두 있는데, 인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니체의 철학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우리를 이끌어 놓습니다.
데리다는 니체를 철학으로만 한정짓는 것에 대해 막으려 했습니다. 니체 텍스트를 구조적이고 그라마톨로지적으로 , 텍스트 자체가 갖는 다양성을 해석하려는 방식, 전기적으로 분석시키려 했는데, 그렇게 니체의 텍스트가 담고 있는 의미, 범주화하려는 시도들을 벗어나려했습니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존재와 진리의 개념을 비판“했으며 ”놀이와 해석 그리고 기호의 개념“으로 대체했습니다. 해석, 구조, 기호, 놀이는 그때그때 펼쳐집니다. 근원으로 향하지 않고, 지금 벌어지는 놀이를 긍정하면서 인간과 인본주의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왜 인간을 넘어서야 할까요? 최초의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신을 믿지 않아도 신학을 믿는 것입니다. 근거를 꿈꾼다던가 최초를 꿈꾼다는 것은 최종과 목표를 꿈꾸는 것이고,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이 처음과 끝을 규정지려는 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니체를 해체하는 방식은 재미있습니다.
A를 비판하려면, a는 아니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a는 무엇을 근거하여 a라고 이야기 하지? a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비판하려면 해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a를 해체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의 해체, 해부를 의미하게 됩니다. 칼을 남들에게 휘두를 수 있다면, 나에게도 그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되듯, 나의 사유를 해체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니체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니체의 ’그 개념‘을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떤 개념만을 가지고 하나로 규정하면 그것에 갇히게 됨을 인식해야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랜만에 채운쌤 강의를 들었습니다.
듣고 나오는 길에 발걸음이 가볍더라구요. 아프다가도 채운쌤 강의 들으면 안 아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사드립니다!
오! 규문으로 다시 컴백한 영아샘^^ 후기로 만나니 더 반갑네요~ (시즌4까지 영아샘의 껌딱지가 될거임) 저도 니체의 글이 처음에는 철학분야에서보다 문학이나 예술가들에 의해 더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니체의 문체가 그걸 말해주는 걸까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은유로 가득찬 글이라 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암튼 우리가 앞으로 읽게될 책 < 데리다-니체, 니체- 데리다>도 니체의 '단편적 글쓰기'가 어떻게 '해체론'인지를 데리다의 해석을 통해 읽게 될텐데요. 이때 데리다에겐 하이데거의 니체 철학적 해석이 출발점이었다고 해요. 영아샘이 자세히 썼듯이 '해체론'에 대한 채운샘의 설명이 앞으로 이 책을 읽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그러니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전혀 몰라도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 보아요....
데리다의 해체 개념을 설명해주시면서 직조된 옷에서 튀어나온 '실오라기' 하나를 붙든다는 것으로 이야기해주셨죠. 깊이 이해했을 때야 우리는 티끌로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요. 그 티끌,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것의 발견,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맥락이 달라지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균열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데리다는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에의 균열을 내는 지점에서 니체철학을 '작가'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킨다는 지점도 재밌었어요. 비유나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의 문체와 단편적인 글쓰기는 니체의 철학, 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우리는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