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수요일 무진장 노장 팀은 1학기 마지막 공통과제와 에세이 구상을 안고 모였습니다. 드디어 <도덕경>을 완독했기에, 에세이 전주임에도 공통과제는 쓰지 않을 수 없었죠. 이번 주에는 부쟁不爭, 용기勇, 약함弱, 물水, 섞여듦 등 노자의 핵심적인 개념들이 과제에 등장했습니다(숙제방에 잘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그치만 언제나처럼 손쉽게 정리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노자의 문장입니다. 가령, 73장만해도 노자에게 용기 있다는 것은 어떤 자세인지, ‘과감한 것敢’에 용기 있는 것과 ‘과감하지 않은 것不敢’에 용기 있는 것은 어떤 차이이며, 죽음/죽임殺과 삶/살림活은 나쁜 것과 좋은 것인지, 성인은 왜 뭐가 이득이고 손해인지를 모르는지 등 수많은 질문이 가지를 치고 이어졌습니다. 부쟁 개념도 마찬가지였지요. ‘다투지 않음으로 좋은 승리를 한다不爭而善勝’라는 구절을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겨루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기는지, 그때의 그 독특한 승리는 뭘 말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새삼, 노자에게 善이나 上이나 大와 같은 최상급의 표현에 주목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선약수上善若水’,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선언무하적善言無瑕謫’, ‘강위지명왈대强爲之名曰大’ 등의 표현을 보면 상관적 차연을 훌쩍 넘어가버리는 차원의 높음과 좋음과 큼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사실 無나 虛와 같은 개념도 그러한 무궁한 지평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채운샘께서는 이번 에세이에서 여러 경로중 하나를 잡고 <도덕경>에 접근해보라고(해체해보라고) 하셨는데요. <도덕경>의 윤리, 배움, 글쓰기, 정치, 예술 등 뿐 아니라 형이상학도 언급을 하셨습니다. ‘道’가 핵심이니만큼 노자에게서도 분명 형이‘상’학적 사유를 끌어낼 수 있을 텐데 이 차원을 풀어보아도 재밌을 듯합니다.
오후에는 에세이 주제 토론을 했습니다.
제현샘께서는 ‘부쟁’이 핵심키워드입니다. 학기 내내 이것이 고민이었죠. ‘쟁’의 여러 층위를 다 쓰기보다는 범위를 좁혀서, ‘<도덕경> 읽기의 어려움’을 분석하면서 텍스트의 맥락과 읽는 나의 맥락, 그리고 거기서 출현하는 읽기 체험의 맥락을 따라가 보며 자신의 전제들을 질문하고 쟁과 부쟁을 질문해가면 좋을 듯합니다.
문영샘께서는 ‘천지불인’으로 ‘잘 하려는 마음’을 해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반목적론으로서의 ‘추구’, 탈중심과 비어있음으로서의 ‘탁약’을 풀어보겠다고 하셨는데요. 죽음이라는 사건을 ‘허’의 개념으로 접근할 때 돌아감(復 혹은 反)의 측면으로 접근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정옥샘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자신의 강박을 문제 삼으면서 노자의 글쓰기에 주목하셨습니다. 은유나 완곡어법과 역설이 가득한 텍스트가 그 폭력의 시대(누군가의 논리가 타자의 학살을 정당화하는)에 어떤 힘이 있었을지를 고민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희수샘은 앎과 소통의 문제가 고민이신데, ‘앎과 맺는 태도’에 주목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데리다를 따라 활자뿐 아니라 이미지나 물질도 텍스트라고 한다면, 익숙함과 단순한 반응을 불러오는 텍스트와 낯섦과 신중함을 불러오는 텍스트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러한 다른 읽기(접속) 방식이 있을 터입니다. 앎이 쉽게 작동하지 않는 텍스트 앞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를, 그때의 앎은 무엇인지 질문하며 ‘知’ 풀어가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윤순샘은 하드한 공부 일정에 따라 써야할 글이 많은 요즘 글쓰기에 대한 물음들을 풀어놓으셨는데요. ‘수월하게 읽히게 쓰는 것이 글의 목적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노자의 글은 수월할까요? 해석의 다양성이 폭넓게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읽을 수 없게 하는 엄밀함과 촉발적 효과가 내재되어 있는 글 같은데요. 노자를 경유해 우리 자신의 글쓰기에서 덜어낼 것과 시도해볼 것을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인영샘께서는 <도덕경> 문장들의 음악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배열과 형식에 주목해주셨는데요. 그렇게 스타일을 분석하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 노자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실존이 함께 고려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양식과 내용(의미)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노자가 어떤 광경을 목도했고 어떤 정치와 삶을 상상했기에 그러한 양식이 펼쳐졌을지를 고민하면 더욱 재미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규창이형은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제목으로 유학의 도덕을 해체하는(그러면서 유학을 풍성하게 재정의시키는) <도덕경>의 사유를 풀어가는 글을 많이 진행시켜서 왔습니다. 한계와 동시에 잠재력을 끌어낸다는 해체 개념이 재밌게 풀릴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 ‘평화’라는 것도 ‘불화’에 대응하는 평온한 상태라기보다는, 노자가 그려내는 성인의 ‘머뭇거림’이나 ‘어려움’의 모습이 반영된(그러나 결코 비장하지는 않은) 독특한 모습을 담아낼 용어로 재구성되어도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노자의 글쓰기를 질문하고 있는데요. 노자가 전하려는 차원은 무엇이며, 언어를 어떻게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가다듬어보고 있습니다. 언어는 경계 같습니다. 분별하지만 이어줍니다. 마치 문처럼요. 노자는 언어를 믿지 않았지만 사용했습니다. 단지 자명한 전달(복제)를 포기한다면,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이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역시 배우는 사람으로써 평생 언어와 관계맺어야 하기에, <도덕경>의 글쓰기와 그것이 전해오는 언어를 넘치는 차원을 따라가보고 싶습니다.
오후 강의에서 채운샘은 데리다의 말을 전해주셨죠. 철학을 넘어간다는 건, 그것을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는 일이라고요. 노자도 최대한 여러 번 읽고 또 읽다보면 그 사이에서 균열이 나타날 것이라고요. 또한 <도덕경>은 노자라는 한 개인 저자의 작업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인상깊었는데요. ‘늙은 선생’이라는 이름처럼, 노자는 일종의 집단성을 반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살아보고 겪어보며 종합된 지혜의 목소리인 것이죠. 그렇기에 우주의 원리와 아주 현실적인인 정치의 층위가 함께 녹아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81장 천제가 일관된 통일성을 갖지도 않지요. 이미지를 사용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의 상식을 이용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게 만듭니다. 한손으로 만들고 한 손으로 허물고 있는 작업방식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결코 마음을 편하게 하는 텍스트가 아니죠. 그런 점에서 좀 여유를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1학기 에세이 발표(4.17)는 평소처럼 오전 10시에 시작합니다. 간식은 각자 조금씩 준비해오고, 후기도 짧은 소감 모음으로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不爭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