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 조에서는 ‘희생과 이기주의의 동일성은 자살이라 불린다’는 소제목의 발제가 있었는데요. 범신론이라는 보편성, 개인적인 행위들에 대한 이기주의라는 관점, 노동과 도덕, 쾌락 혹은 향락과 윤리 등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앞선 문장의 낱말들로 정리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네요. 이 외에 개인적 욕구의 이기적 충족이 행복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이 비난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있었구요. 새로운 경제 관계의 형식을 통해 우애를 정초하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연합조직의 창출에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자란 계급의 표상과 정의가 이뤄지는 시기로 10장과 11장을 이해하기도 했지요. 고역으로서의 노동과 작업으로서의 노동에 대해 랑시에르가 하는 말을 궁금해하기도 했는데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세미나가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부아예의 죽음을 두고 제법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노동과 도덕
『프롤레타리아의 밤』 초반부터 간간이 등장했던 인물, 부아예의 죽음이 10장에서는 좀더 자세히 다뤄졌습니다. 그는 “사회의 현상태에서 노동자에게는 그가 개인적일수록 그만큼 더 행복하다. 그가 자기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의 행복을 원하면 그는 숱한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그가 사회와 자신의 동류를 진지하게 사랑하면 그는 나처럼 생을 끝내야만 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살을 했는데요, 당시에 그의 자살이 ‘이기주의’적인 향락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보편적 사랑, 보편적 단결, 보편적 희생 바깥에서는 저마다의 감정도 사상도 의지도 없’다는 범신론적 ‘보편적 일체성’ 속에서 헌신이라는 절대적 양도는 이기주의적 향락의 절대성에 합류한다고 랑시에르는 쓰고 있는데요. 랑시에르의 말이 알듯하면서도 손에 딱 잡히지는 않습니다.
이 ‘각각의 개인을 성스러운 일체로 삼고, 상반되는 것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범신론적 보편성 속에서 희생과 향락이 동등해집니다. 당시에도 부르주아 언론에게 부아예의 자살은 노동자의 ‘연장을 버리고 펜을 쥐도록 자극하는 오만’을 고발하는 기삿거리가 됩니다. 또한 개혁적인 노동자들의 헌신과 기획들을 이기주의적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지요. 혹은 그의 죽음을 신문쟁이 노동자의 치명적인 허세로 해석하면서 근검절약하는 노동자의 보장된 행복과 대립시키기도 합니다. 노동자의 헌신이나 희생이라고 칭할 수 있는 행위를 이렇게 대하는 태도나 언론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게다가 그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한 식자공은 그가 노동자 심판에 맞서는 청원 서명 운동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에 대한 낙담과 해방에 대한 그의 냉담한 태도가 죽음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1067명의 서명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해방에 무심치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익명의 노동자들은 부아예의 죽음을 헌신 아래 숨겨진 야망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부아예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논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근면과 성실을 노동의 조건으로 요청하는 도덕은 향락이나 무질서를 노동자와 배타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우리조에서는 노동도덕이란 것이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헌신의 표상이 되거나 부의 축적을 도덕적 원리로 작동할 수 있게 했다고 보았습니다. 노동의 여부가 도덕성을 증명하는 것이자 인민(?)임을 증거하는 표식이 되는 거지요. 도덕으로서의 노동은 이제 타인에 대한 배타적 경계로 작동합니다. 1830년대 성밖의 소위 ‘야만인들’은 소유자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1840년에 빈곤이라는 외양은 악덕으로, 성판매자의 무직(?)은 타락으로 간주됩니다. 부르주아들은 이제 음란함과 더러움이 뒤섞인 야만성에 관심을 둘 필요조차 없게 됐습니다. 반면에 노동자는 이 야만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려 애씁니다. 5장의 샤를르- 성밖지대 선술집에 붙들려 시를 들려주던 샤를르가 그곳 사람들의 싸움에 엉켜들어 피를 흘리던-의 모습은 악덕의 표지가 될 것이다. 4장에서 거리를 산책하다 선술집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노동자의 ‘산책’이 가능하던 관계를 왠지 10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노동도덕은 더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고립되는 개인이라는 노동자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타인에 대한 사회적 거부를 정당화하는 도덕률로, 쓸모있는 사회구성원의 표식처럼 작동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민의 도덕성의 사원이 된 작업장’이란 표현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여가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의 특성을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는 지배계급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동자의 쉼없는 노동. 그것을 추동하는 개인적 욕구들의 이기적인 충족이라는 행복에 대한 정의. 노동연합이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해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원환. 여러 난제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는 않지만, 여러가지 질문을 유발하면서 우리를 더욱 사유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죠. "희생과 이기주의의 동일성은 자살이라 불린다."(391p)에서 희생, 이기주의에 관한 그 시대의 논의를 볼 수 있었는데요. 사회에 헌신한 부아예의 자살이 이기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헌신을 야망이라는 형식으로 간주할 수 있음에 기반한 것이죠.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쓴 것이 집단적인 인민적 정체성에의 권리를 상실하도록 합니다. 저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의 시선, 타자의 표상 안에서 찾게 되는 것과 함께 노동자에 관한 정의가 출현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요. 랑시에르의 글을 통해 추상적인 노동과 노동자가 원래부터 있었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제 자신의 노동과 각종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여러가지 공부하느라 바쁠텐데 놓치지 않고 정성들여 써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2조에서도 부아예의 죽음에 대해 꽤 길게 토론했던 것 같아요~ 저희는 하나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다른 이미지들이 덧붙여 지는지에 주로 얘기했습니다. 모두 그의 죽음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선취하고 어떤 하나의 표상으로 묶어 두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노동자 일반으로 확대하기도 했구요. 그런데 토론을 하면서, 우리 자신도 이 잡히지 않는 부아예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묶어 두려 한다는 점 또한 깨닫게 되었네요 ^^ 2조 토론 정성스럽게 잘 정리해 주시고 공유주셔서 감사해요 경희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