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비유의 큰 경과 인연의 큰 경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인연의 큰 경은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인 십이연기를 담고 있어서, 에세이가 끝나고 2학기에 더 살펴보기로 하였고, 오후에는 에세이 주제(붓다와 천사, 고통과 지혜)와 관련하여 채운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오전의 토론은 생략하고 채운샘의 강의를 중심으로 요약하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르의 철학
세르는 특히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에 주목했다. 현대 과학 속에서 이미 이론적으로 기각되었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설이 가지는 풍부함까지를 다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완전히 비과학적이지는 않으면서도 과학의 언저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과학이면서도 세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고, 철학의 영역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즉 지금 우리의 개념의 범주 속에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가로지르면서 존재하는 앎과 존재 방식에 세르는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계속 움직이면서 상수라든가 중심이라든가 원리를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그 주변의 것들에 세르는 시선이 가 있다. 세르가 고대 과학에서 본 것이 이런 소용돌이와 난류와 같은 개념들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성과 어떤 중심에서부터 이탈하는 힘들, 이런 것들로서 사유를 한다는 것이 무엇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 세르의 핵심인 것 같다.
기생자와 헤르메스- 천사와의 차이
세르의 중요한 철학적 형상 혹은 두 모델은 기식자(기생자)와 천사이다. 기생자는 천사하고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천사가 신과 인간의 중간자인데 비해, 이 기생자는 숙주와 분리되지 않고 숙주 내부에 살지만 숙주는 아니다. 그리고 이 기생자는 자기의 기호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교환이나 증여와 같은 숙주와 맺는 관계를 말한다. 이것을 자기 나름대로 이용해서 삶을 진행하는 게 기생이다. 메시지의 관점에서 볼 때 기생자는 신체와 같은 메시지의 회로에 침입을 해서 송신을 교란한다. 우리한테 기생충이 있으면 외부에서의 신호를 신체가 받아들이고 다시 발산하고 해독하는 데 있어서 교란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분명히 숙주 내부에 있지만 종속되지는 않는, 그러면서 끊임없이 숙주에게 간섭하고 간섭을 받기도 하면서 체계를 변화시키는, 굉장히 이상한 존재가 기생자이다. 천사와 기생자는 세르가 생각하는 메시지 체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핵심적인 상징물들이다.
헤르메스는 그리스의 신이면서 경계의 신이다. 우리는 경계석을 만들어놓고 이쪽과 저쪽을 분별하고 구획한다. 언어로 관념에 경계를 두고, 시간과 공간에도 경계를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 경계석에서 비롯된 것이 헤르메스이다. 헤르메스에 들어있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넘나들다’, ‘트랜스하다’라는 것. 이는 넘나들고 가로지르고 변이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구축되어 있는 경계를 계속 무화시키는 작동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헤르메스는 매우 수평적인 존재다(그리스에는 초월 신이 없다). 헤르메스가 경계석을 넘는다는 것은 경계석을 없애는 것하고는 다르다. 우리는 경계석이 있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경계석은 원래 공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기능이다. 마치 분별하면서도 한편으로 관계와 안과 밖을 이어주는 언어나 문과 같다. 이런 차원을 그리스 시대 인간들이 신적인 방식으로 상상한 것이 헤르메스이다.
천사-신학적 측면과 역설적 이중성
그리스 세계가 무너지고 기독교 세계가 등장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이 중세 철학의 가장 핵심이었기 때문에 천사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천사(天使)는 말 그대로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의 사자이다. 신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는 인간하고 같고 영원하지도 않지만, 육신을 갖지 않으며 인간과 같은 삶과 죽음을 거치지도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애매한 존재인 천사에 대한 논의는 13세기 이후부터 다뤄지면서, 천사를 일종의 비가시적 지성체로 보게 되었다. 전지한 존재인 완전한 지성 자체로서의 신과 불완전한 인간의 지성 사이의 엄청난 심연의 격차를 연결하기 위해, 신과 인간 사이의 빈칸을 층층이 채우고 있는 그 지성의 단계들을 천사로서 의미화했다는 설이 있다. 기본적으로 천사들은 신보다는 불안전하고 인간보다는 완전한 이상한 존재들이지만, 그렇기에 완전한 신이 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표적인 사건이 수태고지이다. 종교는 신의 말씀이나 뜻을 어떤 사물화된 방식으로 출현시키거나 시각화 작업을 통해 나타내는데, 그림으로 표현해 낸 천사도 그중 하나이다. 중세 교회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는 이 수태고지의 장면을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태고지 같은 데에서 보는 천사는 실제로 그 인물들 앞에 현현하는 건 아니다. 단지 말씀과 음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천사라고 하는 것은 시대의 말씀의 메신저다. 그런데 메신저가 메시지를 압도한다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는 메시지를 전달한 후 사라져야 하는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의 핵심은 메시지 자체이고 메시지가 더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르가 문제 삼으려고 하는 천사의 역설적인 이중성이 있다.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천사가 요청되고 형상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메시지의 완벽한 전달은 그 메시지만 남겨놓고 메신저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전달한다고 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물건이 핵심이 돼야 하고, 그걸 전달하는 이 매개적인 것은 사라져야 된다라고 하는 일종의 전달의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헤르메스와 마찬가지로 천사 또한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이중성과 딜레마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얘기되고 있다.
천사-소통의 철학
<천사들의 전설>에서 세르가 주목하는 건 소통 문제이다. 이 번다한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세르의 기호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기호를 어떻게 읽고 내가 해석한 기호들을 어떻게 전달해야 될까라는 과정에서 천사라는 형상을 부각시킨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을 할 때,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 대화 속에서 오고 가는 게 의미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보내는 사람 편에도 받는 사람 편에도 있지 않다. 천사, 기생자, 기식자, 이런 것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 세르가 생각하는 메시지의 체계의 핵심은 순전하게 그것을 발화한 자도 아니고 그것을 듣는 자도 아니고, 언제나 이 둘 사이에 무언가가 오고 갈 때의 사이와 그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소음과 잡음이다.
기생자(패러사이트)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소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생물학적 기생충과 사회학적 기생자의 의미와 함께). 난류turbulence)라는 것도 이렇게 뭔가가 소용돌이 치면 거품이 일고 운동하면서 언제나 주변에 회오리나 모래 바람같은 무언가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 요동치면서 운동하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소음 등 뭐라고 딱 존재를 명명할 수 없는 이상한 것들이 메시지 체계에 끼어든다. 세르는 천사에 대해서 이 두 가지의 중의적인 측면을 다 부여하고 있다. 횡적인 존재인 헤르메스에 비해, 천사는 수직적 존재이다. 신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위아래를 이동할 수 있는 날개를 갖고 있다. 이 신의 말씀이 바로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가 계속 끼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말씀을 받아들인 의미가 각각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천사가 그것을 매개해야만 한다. 종교적 극단에서의 천사는 신과 인간을 중개할 수 있는 투명한 존재로서 의미 전달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오로지 대리자이며 사자이다. 그런데 세르는 아주 다양한 천사들을 갖고 와서 천사 자체가 매개자인 순간 이미 투명한 의사 전달 체계를 방해함을 보여준다. 천사가 가질 수 있는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계속 산만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무엇에 의해서 세상의 기호를 해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세상에 또 다른 타자에게 송신하는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천사들의 전설이 더 나중에 쓰였지만, 세르의 사상의 전개 과정을 보면 천사로부터 기생자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스템 안에 있지만 이 시스템에 속하지 않으며 사회의 명령을 받지만 고스란히 수신되는 게 아니다. 이미 거기에는 나의 해석도 있지만 내가 무엇에 의해서 수신되느냐에 따른 교란이 성립한다. 거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맺고 있는 온갖 테크놀로지, 과학, 온갖 앎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 이런 천사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회나 어떤 가치의 명령을 습득할 수 없기 때문에, 역으로 어떤 메시지를 수신하고 송신하는 그 배치, 즉 시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소음과 관계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메시지를 다르게 해석하게 만드는 이런 교란의 장치들이 크게 말하면 배치라고 할 수 있겠다. 세르는 어떤 신의 음성이라고 상징되는 절대적인 원 메시지나 원본과 그 원본을 수신하는 사이에 소음이나 잡음이 하나도 없는 투명하고 진공인 상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혹은 비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진공 상태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를 질문하고, 이 세계는 중심과 원리 이전에 언제나 소음과 교란과 왜곡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러한 잡음과 소음이 메시지의 전제 조건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천사라고 하는 개념이 보여주는 게 뭘까. 우리는 개별자의 삶을 산다. 말 그대로 불완전하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개별자가 전체와 맺는 관계, 즉 개별자이지만 개별자성을 떠날 수 있는 건 연결의 감각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건 타자의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무언가가 계속 소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통은 투명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되고 소음에 의해서 교란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메시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메시지 체계 속에서 우리가 타자의 신호를 읽어내고 그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체계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과 무언가를 나눈다고 하는 거는 뭘까? 세르가 우리한테 던지는 질문은 그런 게 아닐까.
불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천사로서의 텍스트
불교 연구자들이나 번역자들은 기본적으로 불경을 불교가 신화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사람들의 전승 속에서 살이 굳어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고 그 당시 사람들의 어떤 믿음 체계를 반영하기도 하면서 계속 변형된다. 불경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가 아니라 전승을 통해 비정형적으로 왜곡된 덩어리라는 거를 잊으면 안된다. 게다가 부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오기까지 2500-3000년동안 얼마나 많이 교란이 되었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이 <디가니까야>도 하나의 천사로 볼 수 있다. 신의 음성을 현현하는 존재인 천사는 텍스트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불교는 연민이 중요하고 모든 것에 자비를 베풀고 어떤 것도 죽이면 안 되는 등의 말이 원칙론적으로 틀리지는 않으나, 또한 모든 경우에 다 옳은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딱 하나, 연기(緣起)이다. 이 연기를 세르가 말하는 소통과 메시지 체계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중생이라,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분별이 되는 것을 막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불교를 또 하나의 올바른 것이라는 분별 체계 속에서 순수한 무언가로 보존한 채 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놓여 있는 지평 속에서 그것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해독하고 어떻게 우리 스스로가 또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천사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녹취를 푼 듯한 촘촘한 강의 후기네요~
비가시적 지성체로서의 천사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세미나 때 '고와 고의 조건'이 '행고'의 차원에서는 분리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행고는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태 차원에서의 고통일 수 있겠다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과거 7불의 전생담에서 '모태에 들다'라는 표현이 뭔가 '치품천사의 하강'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천사를, 그리고 고통을 어떻게 우리에게 유용하게 '국지적으로' 가져다가 에세이를 써 볼 것인가...
긴장감이 감도는 한 주네요... 아니 사흘이네요!
유쾌하게 써 보고, 쓰는 동안 유쾌해져 보아요~
샘 이걸로 에세이 쓰셔도 될 거 같은데요? ㅎㅎ
세르의 천사론은 정말 많은 생각이 들 게 하는데요. 세르가 천사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우리의 고정된 생각을 교란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일이 에세이인데 한가롭게 후기 읽고 댓글 쓴다고요?
막혀서 이거라도 영감받지 않을까 들어와 봤습니다.
다들 글 잘 마무리하시구 내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