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세계 끝의 버섯>과 <천 개의 고원>1,2장을 정리하는 종합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1,2장의 개념인 리좀과 다양체를 <세계 끝의 버섯>과 연결해 정리해보는 글을 가져와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헷갈리는 지점들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났고, 거기서부터 함께 풀어나가다 보니 개념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리좀과 다양체가 또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궁금해지네요.
리좀 개념에서 저희를 계속 헷갈리게 했던 지점은 리좀과 나무의 관계였습니다. 지난 강의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리좀과 나무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죠. 하지만 저자들이 ‘방편’으로 선택한 이분법을 넘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리좀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나무는 다시 리좀이 되기도 한다거나, 이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다양체라는 설명은 어쨌거나 리좀이라는 것과 나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니까요.
토론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어렴풋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서양란과 말벌의 관계처럼 만남으로 자신과 상대 모두 다른 존재가 되게 하는 관계 자체, 혹은 그러한 과정을 리좀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 ‘되기(생성)’의 다른 말이 리좀이라는 점.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54쪽) 리좀과 나무를 구분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세계가 리좀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사이-존재’로, ‘되어가는 중인 것’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했고, 우리가 ‘사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두 항’의 사이라는 관념을 통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분법이 ‘방편’일 뿐이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우리는 언어화되지 않는 것은 여간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늘 우리의 언어와 이해를 흘러넘칩니다. <천 개의 고원>은 그처럼 흘러넘치는 세계를 언어화하고 개념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죠. 그 산물에 접속한 우리는 그것과 더불어 리좀이 됩니다.
저희는 다양체 개념도 좀더 이해해보기 위해 머리를 모았습니다. 다양체는 세계의 또 다른 면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18)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다양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제나 ‘덧붙이기’가 아니라 ‘빼기’를 해야 한다고 하죠.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시작하라’고요. 다양하게 되는 것이 덧붙이기가 아니라 빼기를 통해 완성된다니,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는 ‘유일’을 빼라는 말에서 ‘중심’을 빼라는 의미가 아닐까 추측해보았고, 이는 <세계 끝의 버섯>에서 강조했던, ‘진보와 근대화의 꿈’ 없이 살아가는 일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진보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합니다. ‘진보가 없다면 눈을 뜰 이유가 없다’는 극단적인 말은 우리 삶에 진보의 담론이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한 담론은 애나 칭이 지적한 것처럼 자립적 개별행위자로서의 개인을 상정함으로써 우리가 ‘마주침’을 통해 ‘오염’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그러한 존재로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다양체로서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진보 이야기를 빼는 것”(<버섯> 497쪽), 유일, 중심, ‘진리’를 빼는 것이 n-1에서 시작하는 것, 즉 다양체 만들기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한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다양해진다는 것'이 양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 다양체가 ‘크기’를 가진다는 말은 공간적인 크기가 아니라 ‘강렬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는 점도 함께 짚어보았습니다. 다음 고원에서도 생각을 계속 이어가봐야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5장(~145쪽)까지 읽어옵니다. 발제는 톡방을 참고해주세요.
- 간식은 해민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