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따뜻한 봄입니다. 꽃이 일제히 폈다가 또 일제히 져버렸네요.
봄 햇살은 뜨겁고, 4월의 이런저런 기억해야 할 날들이 지나는 와중에,
규문에서는 일년 프로그램들이 이제 첫 학기 에세이를 맞아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부디 얼른 일주일이 가기를!).
타이밍이 좋게도 저희는 <에픽테토스 강의> 2권을 다 읽고 첫 번째 책을 뗐고, 한 주 방학을 갖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 마지막 순간에 제가 늦잠을 자버려서 참석을 못했는데요... <에세> 낭송 때도 그런 적이 있었던지라 윤회의 느낌이 듭니다..ㅜ
마지막까지도 에픽테토스는 스토아다운 수신(修身)을 강조합니다.
자신에게 달린 일을 가려내고, 그것에 최선을 다할 것.
아직 자기 배려로 남아 있는 자기 점검의 문장들을 옮기며, 필사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반성적 생각에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아마도, 나도 이러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있을까? 나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정말로 현명한 사람처럼, 자제력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앞으로 닥칠 모든 일에 직면하도록 교육을 받았다고 나로서는 말할 수 있는가?
(*일주일 간 방학을 보내시며 해제를 잘 읽으시고, 4.22 월요일에는 해제로 이야기를 나눠보아요~)
19장 오로지 말하기 위해서만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하여
그런데 너는 이 생각(원칙)들 중 어떤 것을 시험해 보고, 그것들에 대한 너 자신의 판단을 내려 본 적이 있었는가?(401쪽)
21장 비일관성에 대하여
이것에 대한 주된 원인은 좋음과 나쁨에 관련된 문제에서 사람들의 생각의 비일관성과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이유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부끄럽다고 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이를테면 우리는 소심함을 동정심과 마찬가지로 좋은 성품의 표시로 상상하는 반면, 어리석음은 완전히 노예적인 어떤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네. 또한 공동체에 대한 과실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네. 이제 대부분 잘못의 경우에서, 사람들이 그것들에 대해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주된 이유는, 소심함과 동정심의 경우처럼 그들은 그것들을 비자발적인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네.(419쪽)
우리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반성적 생각에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아마도, 나도 이러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있을까? 나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정말로 현명한 사람처럼, 자제력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앞으로 닥칠 모든 일에 직면하도록 교육을 받았다고 나로서는 말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걸맞은 만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는 것인가? 신탁의 조언을 구하러 가는 사람처럼, 나는 순종할 준비가 된 채로 선생님께 가는 것인가? 아니면, 나 또한 코를 훌쩍이는 아이처럼 학교에 가서 단지 [철학 이론에 대한] 학설을 배우며,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책을 이해하고, 또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닐까?’(419~420쪽)
그럼, 누가 치료를 받을 목적으로 학교에 오는가? 누가 그의 판단들을 내놓고 그것들을 깨끗이 하기 위해 거기에 오는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기 위해 누가 거기에 오는가? 그럼, 학교에 왔을 때 너희가 가져왔던 그 판단과 똑같은 판단을 가지고 다시 여기를 떠나간다면, 왜 놀라는 것이냐?(421쪽)
너희들은 철학적 원리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어 하기를 원하지. 자, 어떤가? 너희는 공허한 말을 더 잘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러한 철학적 원리들은 너희의 과시를 만들기 위한 훌륭한 재료를 너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너희들은 추론과 전환 논증을 분석하는 데 능숙하게 되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거짓말쟁이 역설’ 논증과 가언적 추론 논증의 전제들을 검토해 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이 여기에 온 결과를 얻고 있다면, 왜 여전히 짜증을 내고 있어야만 하는가?(421쪽)
인간아, 너는 그것들이 너에게 소용이 있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그것들이 일반적으로 소용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나?(422쪽)
그러면 너희들은 이성이 가질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네!(423쪽)
22장 친애에 대해서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쁜 것들로부터 좋은 것들을 구별할 수 없고, 또 양자로부터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들을 구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가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단지 지혜로운 자에게만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네.(425쪽)
사실상 믿음(성실성)이 있는 곳보다, 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곳보다, 또 고귀한 것에 대한 존중이 있는 곳보다, 또 이것들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 친애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433쪽)
도대체 너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의 감각을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감각 인상들을 구별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너의 몸에 적절한 영양분과 의복과 거처를 공급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너는 지혜가 부족하다고 인정하는가? 제우스에 맹세코, 그것은 그대가 종종 너의 인상들에 잘못 이끌리고, 그것들에 의해 혼란에 빠지며, 종종 그것들의 설득력이 너를 압도하도록 놔두기 때문이네. 그래서 어떤 때는 그것들을 좋게 생각하고, 다른 때는 이 동일한 인상들을 나쁘게 생각하고, 그런 다음엔 다른 때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는 고통, 두려움, 시기, 혼란, 변화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네.(426쪽)
왜냐하면 일반적으로―이 문제에 대해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데―무릇 모든 생명체는 그 자신의 이익보다 더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네. 그래서 그에게 그 이익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형제나 아버지나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든 간에, 그는 그를 계속 미워하고, 경계하고, 저주할 것이네. 이는 본성상 자기 자신의 이익만큼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인 것이네. 이것이 그에게는 아버지요, 형제요, 가족이요, 조국이요, 신인 것이네.(428~429쪽)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경견, 명예로운 것, 자신의 조국, 부모, 친구와 동일한 저울접시에 놓는다면, 이것들 모두가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가 하나의 저울접시에 자신의 이익을 놓고, 또 자신의 친구, 조국, 친척, 정의 자체를 다른 편의 저울접시에 놓게 두면, 그 자신의 이익에 의해 내리눌리게 되기 때문에 후자 그 모두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네. ‘나’(ego)와 ‘나의 것’(emon)을 놓을 수 있는 그쪽으로,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네.(429쪽)
‘내’가 나의 의지가 있는 그곳에 있다면, 단지 그런 경우에서만 나는 내가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친구일 것이고, 아들일 것이고 아버지가 될 것이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것이, 나의 신실함, 부끄러운 감각, 인내, 절제, 협력을 보존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나의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네.(430쪽)
그 대신에 이 질문 하나만을 캐묻도록 하라 즉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자신의 바깥에 놓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의지 안에 놓고 있는지를 묻도록 하라. 만일 그들이 그것을 외적인 것들에다 놓으면, 네가 그들을 신뢰할 수 있거나, 믿을 수 있거나, 용감하거나, 혹은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지 말도록 하라.(432쪽)
23장 말하는 능력에 대하여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의지가 굽어져 있었을 때만 의지 그 자체일 수 있네. 이런 이유로 의지만으로도 악덕이 되고, 의지만으로도 덕이 되는 것이네.(441쪽)
그것이 올바른 의지가 될 때,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해야만 하네. 왜냐하면 표현 능력과 크고 작은 다른 모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지이기 때문이네.(443쪽)
인간아, 너의 목적은 자연에 일치해서 너 자신에게 나타나는 인상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고, 네가 욕구하는 것을 얻는 데 실패하지 않도록 하고, 네가 회피하고자 원하는 것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고, 결코 불운이거나 나쁜 운을 겪지 않도록 하고, 그러나 방해나 제약에서 자유롭고, 훼방받지 않고, 제우스가 통치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그것에 복종함으로써, 그것에서 만족을 발견함으로써, 또 누구의 잘못도 찾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은 자로서 온 힘을 다 바쳐 이 시(詩)를 음송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네. ‘제우스 신이여, 운명의 신이시여, 당신이 나를 이끄소서.’(446쪽)
24장 에픽테토스가 가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그런데, 왜 당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이것 하나뿐이네. 즉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어떤 종류의 세상에서 자신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공유하며, 어떤 것들이 좋은 것들이고 나쁜 것들인지, 고귀한 것과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로, 또 논증이나 증명을 따라가지 못하며,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서로 구별할 수도 없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이네. 그런 사람은 자연에 일치해서 욕망도, 혐오도, 충동(동기)도, 계획도, 동의도, [동의에 대한] 거부와 보류도 행사하지 못하지만, 허나 전적으로 귀머거리와 눈먼 사람이 된 채로, 실제로는 전혀 아무런 이도 못 되는데도 그 자신이 누구라도 된 듯이 생각하면서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네. 이것이 새삼 어제 오늘의 일일까? 오히려 인간의 종족이 생긴 이래로, 우리의 모든 잘못과 불행이 이 무지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참이 아닌가?(452~453쪽)
26장 오류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모든 오류는 모순을 포함하네. 오류를 저지른 사람은 오류를 범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올바르게 행위하기를 원하기에,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네. 실로 도둑이 완수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이네. 도둑질이 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네.(458쪽)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이성적 혼이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네. 즉 저울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무거운 쪽으로] 그것이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네. 지배하는 중심에 모순을 보여 주게 되면, 그것은 그것을 단념할 것이네. 그러나 네가 그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네가 설득하지 못하는 그 사람보다 오히려 너 자신을 탓하도록 하라.(4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