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김종철 선생님의 <간디의 물레>를 읽어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간디에게 ‘물레’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대충 김종철 선생님이 생태 운동의 일환으로 간디의 물레를 가져오시는 거라고 읽었던 것 같은데요. 이번에 읽어보니, 우와. 간디가 운동으로 제시한 ‘물레’가 이런 것이었다니..! 아직 그의 운동 중 일부분만을 봤을 뿐이지만, 벌써 간디에게 매료됐습니다. 호치민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혁명가들의 운동이 그토록 ‘혁명’적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그들이 제시한 운동의 매력이 남달랐기 때문 아닐까요!? 앞으로의 혁명이 기대됩니다!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도 독립운동사> 3장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디의 생애를 읽기 위한 책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간단히 세미나에서 나왔던 인상적인 지점 몇 가지만 정리하고 공지를 마칠게요.
계급 투쟁의 수단으로서의 역사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역사가 이토록 투쟁적일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사실 이 작업은 마르크스로부터 발리바르가 배운 것이겠지만, 누군가의 작업을 이어받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은 저희가 발리바르로부터 배워야 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지난 장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분석했던 것에 이어 발리바르는 부르주아 계급을 분석합니다. ‘기술해야 할 역사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 발리바르에게 프롤레타리아든 부르주아든 계급은 단일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죠. 따라서 계급을 분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세를 구체화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는데요.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난해한 발리바르의 글을 통해 실감하고 있습니다. ^^;;
똑같은 프롤레타리아라 해도 착취당하는 정도와 방식은 매우 다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라 사이에도 무수히 다양한 정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각자 불만이 생기는 지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 참을 수 있는 지점 등이 모두 다르게 되는 것이죠. 지금 중년세대와 MZ들을 생각하면, 하나의 프롤레타리아로 보이지 않을 만큼 분열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부르주아 계급’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서로 다른 정서를 가진 무수히 많은 부르주아 분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다양한 부르주아 분파들이 ‘하나의 부르주아 계급’으로 통일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이 부분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는데요. 흠흠. 이해한 만큼 정리해보면, 핵심은 프롤레타리아든 부르주아든 자본과 먼저 만난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대립하는 상대 계급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메커니즘이 동일하지 않고 매우 복잡한데요. 어쨌든 발리바르는 계급을 분석하기 위해 자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본의 유형은 무엇인지 등을 분석하는 것도 계급이 출현하는 다양한 양상을 포착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공적 자본과 사적 자본, 은행 자본 등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지금 계급을 출현하는 자본의 운동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맥락이었던 것 같고요.
이러한 발리바르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문제는 ‘자본의 운동’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단순히 계급적으로 대립되는 부르주아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구조적으로 착취가 성립하는 토대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 부분이 참 쉽지 않은데요. 지난 장에서 읽었을 때도 이게 어떻게 시도될 수 있는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아마도 발리바르는 계급의 성립과 계급 투쟁이 일어나는 자리는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계급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이해한 다음에 그렇게 성립되지 않을 지점을 모색하는 것 같은데요. 음... 이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왜 투쟁에 있어서 역사적 분석이 빠질 수 없는지 점점 이해되는 것 같아요.
비폭력으로서의 ‘하루 30분 물레 돌리기’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많이 듣긴 했지만, 그게 이토록 감동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간디가 비폭력을 주장한 것은 단순히 폭력을 ‘야만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비폭력이란 정확히 말하면 ‘아힘사’, 곧 ‘살상(himsa)에 대한 부정(a)’이며, 진리를 실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즉, 간디에게는 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며, 비폭력이란 진리를 위한 실천인 것이죠. 따라서 간디가 실천하는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부정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비폭력은 그의 운동의 핵심 원칙으로 작동했고, 그는 자신이 주도한 모든 운동이 조금이라도 비폭력에서 벗어나는 순간 ,결과와 무관하게, 운동을 그만뒀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비판도 받았고, 지지자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이 일종의 영성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간디가 대책 없이 비폭력을 실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의도’를 가지는 것만으로 불가능하죠.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간디는 그것을 ‘하루 30분 물레’와 ‘인도인들의 전통 의상인 카디 입기’로 시도했습니다.
“물레의 경제학은 새로운 마을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간디에게 외제 옷의 배척은 단지 영국 정부에 대한 하나의 압력 수단이 아니라 인도의 옛 시골 경제를 부흥하는 수단이었다. 물레는 경제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 간디는 물레를 경제적 병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일 뿐만 아니라 국민 통합과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 내놓았다. (...) 직접 손으로 짜 만든 옷감을 사용하는 운동은 가난에 고통 받는 농민의 형편을 크게 개선했으며 나아가 애국심의 문제로 연결되었다. 수제 옷이 인도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사실상 제복이 되었다.”(264~265)
당시 인도는 영국의 면직 사업으로 인해 수탈당하고 있었죠. 많은 인도인들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의 옷을 사 입지 않는 ‘비협조’ 운동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간디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물레와 카디를 통해 단순히 외국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도인’으로서의 공통된 정신까지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도인'으로서 '비폭력'을 실천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인도인'으로서 바로 서기 위한 평화적 실험이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간디는 '비폭력'을 화두로 지금 인도인의 상황에 적합한 행동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간디를 조금 밖에 모르지만, 벌써 저는 간디에게 빠졌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읽은 부분에서는 간디의 생 자체보다는 간디의 운동들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죠. 그래서 내성적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급진적이게 되었는지, ‘비폭력’을 결심하게 된 계기나 사건은 무엇이었는지가 간략하거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생애를 통해 그가 어떻게 혁명의 길을 걸었는지 보고 싶네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려면 인도가 처한 식민지 상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봐야 한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간디를 잘 몰랐을 때는 단순히 국산품을 애용하고 영국에 맞서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식민정책이 인도에 가한 경제적 정치적 수탈과 억압, 그리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