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독’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시간이긴 하지만 미리 텍스트를 읽고 남긴 질문을 기반으로 했기에 더 밀도 높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기에서는 텍스트와 강의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시아독’ 첫 시간의 텍스트는 버나드 맥그레인의 <인류학을 넘어서>입니다. 인류학 강의를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그걸 ‘넘어서’려는 텍스트를 읽었네요. 저자는 인류학이란 타자와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은 아닐지 의심합니다. 분명 나와 다른 타자를 만나서 서로의 문화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학문이 ‘인류학’일텐데, 저자는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저자는 왜 인류학을 ‘넘어서’려고 할까요? ‘넘어서’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악마’로 등장한 타자
이 책은 인류학의 담론이 나타난 배경을 문제 삼습니다. 인류학이란 말 그대로 ‘인류’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부터 모순이 생깁니다. ‘인류’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학’은 그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문입니다. <인류학을 넘어서>는 인류학의 이러한 태생적 딜레마를 문제 삼는 책입니다. 맥그레인은 푸코의 <말과 사물>의 논의를 빌려 인류학의 딜레마를 이야기합니다. <말과 사물>에서는 서구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계보를 그립니다. 그 끝에는 마침내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기 시작한 근대가 있습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인류’의 한 부분인 서구인은 어떻게 ‘인류’를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배경에는 서양의 기독교와 진보 관념이 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한 사건은, 단순히 세계지도의 확장만을 초래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관 자체를 다시 정립해야 하는 사건이었죠. 이전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세계는 ‘기독교인’과 그 기독교의 적인 ‘반(反)기독교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에 동방 끝까지 여행을 떠났지만, 자신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질만한 혼란을 겪지는 않았죠. 중세만 하더라도 세계(유럽)는 ‘한계’에 휩싸여 있었고, 그 너머(그 외 다른 곳)에는 악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옥이 인간 세계와 같은 차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넘어선 콜럼버스가 만난 게 ‘악마’가 아닌 ‘인간’이었으니, 세계관에 분열이 일어나는 일이었죠. 유럽인들은 생소한 ‘타자’가 등장하자 ‘저들’을 ‘우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를 두고 오랜 세월 고민했습니다. 저들은 뭘까? ‘악마’일까?(르네상스 시대) ‘자연’이며 ‘신화적(오류)인 것’일까?(계몽주의 시대)
고민은 근대까지 이어집니다. 근대는 진화론의 시대입니다. 과학과 역사의 시대죠. 근대의 ‘우리’는 과거로부터 결별해 ‘현재’로 왔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와 결별했지요. ‘우리’의 ‘현재’는 진화의 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뭘까요? ‘진보’ 관념 속에서 그들은 ‘우리’와 ‘현재’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거’를 사는 사람들로 대상화됩니다. 아직까지도 ‘인류학’ 하면 ‘원시인의 삶’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학문의 형성 배경에 진보 관념이 녹아 있기 때문이죠. 인류학은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세계, ‘살아있는 화석’으로서의 타자를 탐구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류’의 한 부분임에도 ‘인류’ 자체를 대상으로 두고 연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19세기 인류학이 탄생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단일하다 여겨지는 집단, 종족으로서의 인간’은 이렇게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인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두고 ‘틀렸다’, ‘원시적이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교육받았고요. 대신 ‘문화가 다르다’라고 말하지요. 20세기부터 인류학은 ‘문화’를 연구합니다. 타자를 오류로 보고, 과거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세련되어졌지요. 그런데 ‘문화’는 정말 만병통치약일까요? 저자는 여행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여행을 갈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국적인 타자성”을 찾아 떠나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본 것을 멀리 비행기 타고 나가 보고 싶지는 않은 거죠. ‘다른 문화’란 관념은 ‘나’와 구분 지어진 타자를 출현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에도 타자의 이질성을 대상화하는 면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모두가 같은 인간이고 ‘다른 문화’를 가졌다는 인식은 놀랍게도 타자에 대한 경멸과 우월감을 낳습니다.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면 나와 다른 ‘저들’ 또한 노력하면 ‘나’와 같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포함하기 때문이죠. 이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상화하여 연구한다는, 인류학의 태생적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학이 “‘이질 문화’에 대한 근대 서구의 독백”이 아니기 위해서는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요?
차이, 배제 혹은 배움의 자리
강의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우리가 ‘타자의 시선’을 늘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울을 볼 때도 자신의 앞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뒷모습은 언제나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을 상상하는 수밖에 없지요. 즉 타자의 시선은 ‘나’라는 동일자의 의식과 존재를 완성시키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존재해 오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은 타자를 대상화하고, 분별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제의 방법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강의에서는 현재 인류학의 조류인 ‘존재론으로의 전회’가 소개되었습니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인식’하는 인식론이 그동안의 학문에서 강조되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저들과 우리가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존재론으로의 전회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으로의 전회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인류학을 넘어서>에서는 바슐라르의 말이 두 번 인용됩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용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그 대상은 우리가 먼저 선택한 것이기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드러내는 것보다 그것이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드러낸다.” 이 말은 인류학이 그동안 ‘인간’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일종의 ‘객관적’ 심판자 자리에 앉았던 것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지금 우리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타자를 어떻게 만나는가가 곧 ‘나’를 보여주는 것이죠. ‘차이’를 본다는 것은 타자와 나를 구별짓고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배움을 촉발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류학은 주체 인간이 대상 인간을 마주하며 ‘차이’를 찾아내는 학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학문보다 더 강렬한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타자를 볼 때마다, 혹은 그런 ‘차이’를 볼 때마다, 그런 타자와 차이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 ‘나’를 볼 수 있는 것이죠. 그 ‘차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중심’일 수 없음을 계속 상기하게 됩니다.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전회란, ‘차이’를 배제의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이렇게 출현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차이를 배움의 장소로 삼는 것이죠.
‘차이’를 배움의 장소로 삼는 방법은 타자와 ‘대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번역’을 동반하고 어쩌면 ‘우리’ 자체를 해체할 위험 또한 동반합니다. 인류학에서는 이것을 ‘참여관찰’이라 부릅니다. ‘관찰’이 독백이라면 ‘참여관찰’은 차이를 관찰하는 동시에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견고한 중심성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것을 ‘번역’이라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번역은 다른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일반화 하거나, 나와 완전 다른 것이라고 완결된 것으로 보는 길 외에도 ‘구획을 벗어나 계속 상호변이 되는 존재론적 변환의 작업’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우리’의 조건을 계속 질문하는 작업. 이것이 인류학이 태생적 딜레마를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성찰하게 하는 학문일 수 있는 이유 아닐까요?
다음 시간에는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오월의봄)를 읽습니다. 브라질 원주민 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한 크레나키는 인류학을 ‘넘어서’와는 전혀 다른 방향, ‘왜 지금 인류학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한답니다. 이 책을 읽고 질문을 반장에게 보내 주시거나, 본인에게 남은 구절을 뽑아 짧은 감상과 함께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4월 25일 목요일에 만나요!
오~! 후기가 이래서 필요하군요. 책을 읽고 이런 저런 상념과 이미지에만 머물러 있다가 강의를 듣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유에 두근거리며 휘청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정리된 후기를 읽으니 왜 내가 인류학을 공부해야하는지 나름의 방향 설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수업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건만 돌아서자마자 다 까먹고 혼미한 상태로 있었는데 후기를 읽으니 다시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ㅎㅎ 채운샘이 강의 개설 취지를 말씀하시며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비슷한 주제로 다른 책을 읽은 기억이 떠올라 인류학이 쬐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채운샘의 가이드를 따라 다른 책들도 잘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강의를 통해 일부로서 전체를 설명하려는 태도와 자연물을 대상화하려는 태도(지구는 푸른별 타령ㅎㅎ)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인간은 인류와 자연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류와 자연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오만한 것일 수 있겠구나 하고요.
팀 잉골드의 "우리는 세상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인상깊었습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기술될 수 밖에 없는 자연이 있고, 이러한 삶의 방식을 가진 나이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타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삶들을 마치 인간의 보편적 무엇으로 정립하려는 인류학자들의 시도는 자신의 관점 또한 어느 조건에 놓여있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객관성에 대한 재정의를 기억해야할 것 같아요. '객관성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하고 구체적인 신체화"에 관한 것', '부분적인 퍼스펙티브만이 객관성을 보증한다'는 문장이 인상깊었습니다. 총체적 기술은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전체로 회수되지 않는 부분 자체를 논해야 한다는 문장 또한 인상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