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힌 자들의 살아감
이번 주(4.12)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의 세 번째 시간으로 8장 ~ 10장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글의 전개가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내용과 더불어 부가된 어려웠습니다. 역사 책이라고 하면 시간순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계속 상기하면서 읽어야 하는 점은 톰슨이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계급이 한 순간에 떠오른 것도 아니고, 하나의 구조나 범주도 아닌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시기 국가의 역할과 장인들의 몰락과 직조공들의 하락 속에서 생활양식의 변화, 그리고 노동계급의 대응과 삶의 모습을 얘기하면서 순간순간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습니다.
1780년과 1830년 영국의 정부는 결사 금지법을 만들고, 분규를 일으키는 직종 단체나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협의회 대표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장인들이 ‘공정 임금’이나 ‘관습 임금’을 지켜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자유방임 원칙을 내세우며 수공업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외면합니다. 15시간에 이르는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양심적 요구에 대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최저임금제 요구는 의회에서 세 차례 안건 상정은 되었으나 모두 압도적 표차로 부결됩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생필품에는 세금을 매깁니다. 이들 물품세로 징수된 세금은 50%이상이 국채 상환에 사용되었고 민간 행정업무에는 기껏 7%만 사용됩니다. 그러나 정작 제조업자의 재산인 공장의 역직기에는 세금도 부과하지 않고 기계에 세금을 부과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묵살해 버립니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할 때는 치안관들이 나서서 탄압하고, 제조업자가 최저임금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보내면서 자본가의 편에 앞장서는 역할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신빈민법이란 것도 빈민들의 최종 종착지인 구빈원을 감옥보다 더 지내기 열악한 조건으로 만들어 입소자들을 다시 공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작동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국가의 행태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복지제도 역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자본가들의 이익에 대해 조용히 입다물게 하고 모두 일하게 만들려는 방식이라는 얘기들을 했습니다. 다소 다른 의견들도 있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들, 직조공들은 직종별, 지역별 협의회를 만들어 정부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였고, 계속 거절되고 착취당하면서 노동조합이 직조공 중심으로 급진화되어간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이 시기는 도제 제도가 붕괴되면서 장인들과 기술직 종사자들이 몰락하고 선대제와 공장제 공업에 의해 새로운 단순직 노동자들이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초기 노동조합의 형태가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 장인들
톰슨은 기존의 여러 통계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편평하게 보여준 자료들을 비판하면서 보다 장인과 직조공을 비롯한 여러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장인 및 직조공들이 새로운 기술과 기계의 도입으로 거대한 썰물처럼 다가오는 불안감과 적대감, 신분의 위상 변화 속에서 거기서 살아내기 위해 조합을 만들어 시위를 벌이고, 일정 정도의 물건값을 받기 위해 동직 조합을 구성하여 직종에 따라 싸움을 벌입니다. 그래서 협의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보호를 받습니다.
1830년대에도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공장에 소속된 공업 노동자가 아니라 소규모 작업장이나 자신의 집, 건축시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종으로 보면 건축업, 제화공, 양복 제조공들이 제일 많았죠. 당시에도 노동 귀족이라 불리는 장인이 있었고 같은 직종내에서도 1840년대까지 런던에는 같은 직종안에 ‘지체가 높은(honourable) 사람’과 ‘지체자 낮은(dishonourable)’ 사람간의 분명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도제제도 하에서 각종 물건을 생산하는 기술은 장인을 통해 전수되는 것이었므로 그들이 가진 ‘비법’은 그들의 자부심이자 재산이었습니다.
이 시기 임금이나 수공업 제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관습 가격으로 정해졌으며 이들이 직접 재료를 구하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심볼이었으며 도시 노동자들에 대한 우월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대제 공업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재료나 원하는 방식의 생산이 어려워졌고 마스터에게 종속됨에 따라 신분도 불안해졌고 동직조합의 방어 능력도 없어 도제제도가 폐지되면서 자존심, 자부심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농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토지였다면, 이들이 가장 크게 요구한 것은 독립이었습니다. 선대제하에서 그들은 독립을 잃어버렸고, 그후 자동화된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들의 ‘비법’은 쓸모를 잃어버리고 이들은 부두노동이나 토역꾼 같은 비정규 노동으로 그럭저럭 버티거나 임시 노동자, 비렁뱅이로 살아가기까지 합니다. 몇 주 동안을 계속해서 하루에 1페니짜리 빵과 펌프물을 마시며 버티는 막노동자로 살게 됩니다.
- 직조공들
낙관론자들은 1780년 ~ 1820년 시기동안 평균적인 생활수준은 높아졌고 당시 노동자들의 삶이나 임금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직조공들의 임금은 그 어느 때보다 낮았습니다. 1788년과 1803년 시기는 ‘직조공들의 황금기’라 불리는데 이는 장인과 직조공들의 신분상실이라는 더욱 본질적인 변화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장인이나 직조공들은 ‘수직공’으로 합병되고 재래의 장인들은 새로운 이주자들과 동등한 지위에 놓이게 되고 농사와 직조를 병행하던 다수의 직조공들은 방적공장의 직조기에 매달리기 위해 얼마 안되는 경작지를 포기하게 됩니다. 직조는 막노동 다음으로 돈을 벌수 있는 수입원인데다 단순노동이 가능했기에 농업 노동자, 제대군인, 아일랜드 이주민 등이 유입되어 공급원이 넘쳤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은 계속 하락합니다. 임금이 하락함과 동시에 1830년까지 직조공의 수는 점점 증가하였습니다.
직조공들의 삶을 비참하게 내몬 것은 기술의 발달보다는 선대제 방식이었습니다. 제조업자들은 싼 가격에 직조공을 고용하여 필요 이상의 엄청난 양을 직조공들에게 만들라고 강요했습니다. 토지에서 뿌리뽑힌 사람들과 이민자들, 몰락 수공업자들이 몰리면서 직조공의 임금은 더 낮아졌고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고 노동 강도도 강해집니다. 기계보다 임금이 더 저렴했기에 저렴한 임금은 기계의 발명을 지연시키게 되죠. 선대제 하에서 직조공들은 선대업자에게 진 빚을 할부로 갚아야 했으므로 임금이 아무리 낮더라도 거부할 수 없었습닏다. 자신의 노동력 가치도 제대로 받지 못함은 물론 한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직조공들은 지역적으로 넓게 퍼져 있어서 다른 직조공들이 얼마의 임금을 받는지 알 수도 없었고 직종내 협의회 등을 만들기도 어려웠습니다. 산업 혁명기 기술혁신은 성인 숙련노동을 생산물과 생산현장에서 쫓아냈습니다. 토지로부터, 개인 기술로부터 뿌리 뽑힌 자들은 인간의 근육을 무한정 사용하는 고된 작업에 값싼 노동력을 무한정 제공하였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광산, 부두, 벽돌쌓기, 가스, 건축, 운하, 철도 등은 기계화가 거의 필요없었습니다.
1808년 법정 최저임금제가 하원에서는 거부하면서 1만명 이상의 직조공들이 며칠간 시위를 했으나 유혈진압 됩니다. 최저 임금을 지지한다고 말을 했다는 이유로 제조업자는 감옥에 투옥되기도 합니다. 국가의 법적 보호에 희망을 잃은 직조공들은 정치적 급진주의로 선회하게 됩니다. 또, 1825년 2월 역사상 가장 치열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2만 명의 직조공이 참여하여 23주나 싸웠으나 파업자들의 완전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1824년 결사금지법 폐지) 고용주들은 조합을 부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강요했고 이를거부한 사람은 방적공장에서 모두 해고시킬 만큼 힘이 막강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직조공들은 공동체 속에서 질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요크셔와 랭커셔 직조 공동체에는 지역적 자부심과 문화적 교양의 독특한 혼합으로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직조공들에게는 상당한 잠재력이 있었습니다. 직조공 생물학자, 직조공 수학자, 직조공 지질학자 등이 있었고 자기들끼리 박물학 협회 등을 만들어 문서나 나비를 수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역공동체는에서 협의회가 만들어집니다. 선대제 도입 이후 이들의 삶은 파괴되었고, 1816~20년의 랭카셔의 직조공들은 급진주의로 선회하며 이들과 비슷한 지역공동체에서 후기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나오게 됩니다. 1840년대 직조공들은 잉글랜드 공업 노동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노동자 그룹이었으며 직조 공동체들은 차티스트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는데 북부와 미즐랜드 지방의 차티스트 지도자들은 대부분 직조 선대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이라는 자체 방어수단을 갖지 못한 직조 노동자들은 매우 심한 억압과 착취를 당했습니다.
- 생활 수준과 실제의 경험들
1833년 일어난 운동은 노동자들의 불만은 단순한 임금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가족의 분해, 가정의 분열, 사람의 마음을 인간성의 더욱 선량한 부분 즉 그의 본능과 사회적 애착에 연결시켜주는 모든 유대의 붕괴..”(469)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개스컬은 평가합니다. 산업혁명은 가정의 모습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물론 산업혁명 이전에도 아이들도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각자의 텃밭도 있었고, 집안의 단순 노동도 많았죠. 그러나 어린이들은 적어도 기계적 리듬에 따른 단순노동은 아니었으며 부모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식사라도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 모여 식사를 하고 노래 부르며 일할 수 있었고 가족 공동체 안에서 부양이 가능했지만 공장제는 이런 리듬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공장제 공업과 형편없는 저임금 때문에 산모는 아래에 깔고누울 이불이 없어 선 채로 출산을 해야 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에게는 아편을 투여해서 잠들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780년 ~1830년에는 어린이 노동이 강화되었습니다. 노동자 부모들의 저임금은 아이들을 공장으로 내몰았죠. 걸음마 시작 후 곧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분류하는 일을 시켰죠. 기계가 시키는 리듬에 따라 쉼없이 강제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7~8세면 솜틀에 솜을 펼쳐놓는 일을 하고, 11살이 되면 방적일이나 직조일을 했습니다. 8세의 여자 아이는 하루 13시간 고용되어 갱도의 통풍구를 열고 닫는 일을 했으며 몸이 약하거나 강한 아이를 가리지 않고 기계는 작업환경, 규율, 속도, 작업 시간을 배정했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새벽 5시 반에 일을 시작하여 저녁 7,8시까지 하루 14시간~16시간의 일을 해야 했고 1819년, 1933년 노동 제한 연령법이 만들어졌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처벌받지도 않았습니다. 가정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죠. 피로에 지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만날 시간도 없었고, 그렇게 노동을 해도 생활은 매우 궁핍했습니다. 공장일의 강도와 강압적 리듬이 미치도록 힘들어 구빈원에 가본들 여전히 고된 노동과 통제된 규율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자식 중 절반은 채 5살이 되기 전에 사망.”(453)합니다. 1842년 통계를 보면 리버풀의 경우 노동자들의 평균 사망연령은 15세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이 시기에 종교는,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보겠습니다.
산업혁명의 이면에 장인들의 몰락과 직조공들의 나날이 처참해지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보니, 그동안 얼마나 편향적인 자유주의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낙관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임금은 작품의 우아함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전통의 유지와 자기작품의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장인정신이 수요와 공급의 시장가치에 떠밀려 뿌리째 뽑혀나가는 것도 참담했습니다. 노동환경의 변화가 어떤과정으로 노동자의 자긍심이 파괴되고 인간으로서 활력을 잃고서 자발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게 되었네요. 정랑샘 자세한 후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 된 이유가 낮은 임금이나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은 어린이 노동이라 하더라도 가정 내에서 일시적으로, 단계에 맞게 하는 것과 장시간 단순노동에 억지로 묶이게 되는 것의 차이도 정말 잘 보여줬고요. 노동이라는 게 단순히 시간 대비 비용으로 계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