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의 다른 팀은 에세이를 쓰면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주네요. 절차탁마팀은 새로움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학기에 함께 했던 난희샘의 빈 자리를 경원샘이 채워주셨습니다. 청주에서 올라오셔서 늦은 밤 니체세미나까지 하시느라 기인 월요일을 보내고 계시지요. 2학기뿐 아니라 내내 같이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맘이 솔솔 생기고 있습니다.
유예된 죽음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첫날밤을 치른 제 신부를 처형하는 술탄 샤리아, 그런 술탄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죽음을 미루는 신부 셰에라자드. 그리고 술탄의 신부가 된 제 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 청하는 디나르자드. 그녀들은 술탄에게 바칠 신부를 물색하는 대재상의 딸들이다. 그런 아버지의 만류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술탄의 부인이라는 위험천만한 관계를 자청했다. 그런 셰에라자드가 믿는 것은 고작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는 그 왕국에 사는 딸들의 죽음을 유예시키는 힘이었다.
언니의 죽음을 미루고 싶었던 디나르자드는 이야기 듣기를 매일 청한다. 그러던 그녀도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어 제 시름과 두려움을 잊는다. 천일야화에서 이야기의 실행은 화자의 원함으로 이뤄지는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란 듣고자 하는 존재가 있어야 가능하다. 천일야화에서 듣기란 대단히 능동적인 행위였다. 듣기란 동행의 결단이었다. 디나르자드는 언니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술탄과 언니의 침실에서 밤을 함께 보낸다. 그 밤은 디나르자드에게는 권력을 쥔 낯선 존재 술탄과 곧 죽을 운명인 사랑하는 언니로 인해 두려움과 상실, 슬픔을 겪는 시간이다. 그녀는 그 밤을 지내며 동이 트기를 기다린다. 부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천일야화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상대를 쉽게 설득할 수 없을 때 꺼내진다. 그런 이야기란 존재는 묘한 위치에 있다. 이야기는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빗댄 것일 뿐 결국은 제3의 것이다. 아니 화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니 제 것이지만 온전히 제 것은 아니다. 발화되는 순간마다 이야기는 말해지는 자에 의해 재구성된다. 상황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다. 아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생명력을 잃고 상대는 관심을 잃는다. 그럼 이야기는 성공하지 못한다.
세미나에서 무엇인가를 구성하는 작업 즉 이야기화한다는 것은 제 삶을 객관화하는 행위란 말이 있었다. 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야말로 객관화하지 못하면 이야기로 만들 수 없다. 자신과 잠자리에 든 여인을 죽이는 술탄의 폭력은 무력감에서 비롯된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서 떠나지 못한 술탄의 삶,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음이 집행된다. 삶이 영원할 거란 착각에 빠진 탓인지 술탄은 ‘죽음’을 택한다. 반면에 두 자매는 삶이란 유예된 죽음의 순간임을 아는 자들이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들, 제 삶을 객관화할 수 있는 존재였던 그들이 이야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듣던 술탄도 어느새 여성과 아내라는 존재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거두다. 그리고 이야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된다. 제 삶의 조건을 아는 자가 이야기를 즐길 줄 안다.
채운샘은 이야기의 힘과 관련해서 모든 것이 필멸하는 세계에서 필멸성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글쓰기(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다. ‘존재는 남지 않는데 이야기는 남는다. 이야기는 더 멀리 간다.’ 《천일야화 1》을 읽으며 인간이란 이야기가 살아가도록 하는 숙주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모욕과 억압도 인간의 이야기를 죽이진 못했다. 오히려 이야기는 그 모욕과 억압을 양식으로 삼아 자신을 변형시키며 스스로 이어갔다. 서양의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던 그녀는 다른 구혼자의 선택을 미루기 위해 아버지의 수의를 만들겠다며 베를 짠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 베짜기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베를 다 짜면 모두 풀어서 다시 짜기를 반복한다. 이 페넬로페의 베짜기는 이야기의 머묾과 떠남이라는 이중성, 사라짐과 이어짐이라는 관계성, 날실과 씨실의 엮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좀더 생각해 볼 부분이다.
누더기 좋은 말로 패치워크 , ‘천일야화’
《천일야화》 혹은 《아라비안 나이트》라고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절차탁마 수업에서는 프랑스의 작가였던 앙투안 갈랑이 18세기에 번역한 작품, 《천일야화》를 읽는다. 영국작가 리처드 버튼이 19세기에 번역한 영역본은 《아라비안나이트》란 제목이다. ‘아리비안나이트’ 하면 떠올리는 지니,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신밧드의 모험 등은 원본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원본이란 15세기에 종합된 원형을 말한다. 이슬람 문화권의 정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인 ‘천일야화’는 오랜시간 광범위한 지역을 떠돌며 이야기들이 각색, 추가됐다.
페르시아에서 ‘천’은 무한의 의미라고 한다. 천일에 걸쳐 끝을 맺었다는 이해보다는 무한하게 펼쳐진다는 의미로 읽힌다. 인도 북부 지역의 설화를 6세기에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면서 페르시아 설화가 덧붙는데 이것이 천일야화의 1차 언어라고 한다. 이것들이 아라비아 반도로 전해져 9세기에 각색되고 추가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15세기에 우리가 읽고 있는 천일야화의 원형의 형태가 갖춰진다. 천일야화에는 이집트 지역의 설화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천일야화엔 지역적으로 인도를 거쳐 중앙아시아, 이란, 이집트를 거쳐 서유럽에 다다르고, 시간적으로 6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힌두교, 페르시아, 이슬람, 이집트 문화가 담겨있다. 아라비아 반도에 사는 상인들의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앙투안 갈랑이 끼워넣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엄청난 변형을 겪고 접속력을 지닌 ‘천일야화’— 이것이 ‘이야기’의 힘같다—를 채운샘은 ‘누더기’ 좋은 말로 ‘패치워크’라고 하셨다. 리좀에 비유하기도 하셨다.
이야기란 그것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 지리적 환경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의식을 드러낸다. 인도북부에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는 거대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인간이 정착해서 살기 어려운 지형이다. 천일야화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정주와 떠남을 오가던, 떠돌면서 서로를 이어주고 변화하던 인류라는 심층과 우리가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학기에 읽은 《신곡》에서는 서양 중세의 철학과 가치판단이 단테라는 한 인물에 의해 집대성되어 상상된 시공간을 볼 수 있었다. 《천일야화》와 《신곡》의 접속어나 연결어미는 무엇이 좋을까, 생각하면서 이번 학기를 보내도 좋을 것 같다.
〈공지〉
* 〈천일야화〉 2권을 모두 읽어오세요. 그 중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문장을 골라 필사하고 고른 이유도 간단히 적어옵니다. 과제는 일요일 밤 12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 〈이슬람 문화〉 1장을 모두 읽어오세요.
* 이번 주 〈이슬람의 세계사〉는 1장~5장까지 읽어오세요. 내일 줌에서 만나요.
* 이번 주 문학과 철학 후기는 지원, 역사세미나 후기는 호정, 다음 주 간식은 해민.
"경원샘이 2학기뿐 아니라 내내 같이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맘이 솔솔 생기고 있습니다."222^^
이야기의 숙주로서의 인간! 정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무수한 숙주를 거쳐왔을 천일야화. 우리도 잘 키워서 보내주어야겠습니다ㅎㅎ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게 되어 흥미롭고, 역사와 함께 보니 이야기들에 입체감이 생겨나네요. 이번 학기도 즐거울 거 같습니다~~
이야기가 살아가도록 하는 숙주가 인간이라는 표현 정말 재밌네요 ㅋㅋ 끝도 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니 그 표현이 완전 와닿습니다.
사람의 몸을 빌려 여기저기 건너다니고 옮겨다니면서 몸뚱이가 계속 불어나는.. 거대한 이불 같은 생명체가 상상된달까요 @_@ㅋㅋ
천일야화에 걸쳐져있는 나라, 도시, 민족, 종교들이 너무 다양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요,
인간은 거기에 많은 구분을 두고 경계를 짓고 살아가지만, 정작 이야기는 숙주의 정체성 따위 상관없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변형되고 재구성되는 게 인상적입니다.
꼭 이슬람의 얘기다, 아랍인 혹은 페르시아인의 설화다, 라기 보다 경희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떠돌면서 서로를 이어주고 변화하던 인류라는 심층"을 마주하는 느낌..!
<신곡>을 읽을 땐 자신의 질문을 들고 끝까지 탐구해 나가는 단테의 모습에 너무나 매료되었는데, <천일야화>에서는 맥락 잃은 도주와 불균질함에 그냥 나를 맡겨버리는 느낌입니다.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신곡>과 <천일야화>를 정말 어떤 접속사로 연결하면 좋을지....? 그래도 전 'and' 에 한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