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강의]
-<어떤 여름의 기록>
쟝 루슈와 에드가 모린이 만든 1961년작 <어떤 여름의 기록>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요. 이 영화는 시네마 베리떼(cinema verite)라는 형식을 취하며 1960년대 파리지앵을 고찰한 일종의 기록 영화입니다. 영화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카메라 앞에서의 진실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 속에 느닷없이 이것이 현실이 아니며 만들어진 것이란 점을 강조하는 장면들을 등장시키곤 하죠. 시네마 베리떼라는 형식은 바로 영화라는 만들어진 현실과 그 밖의 현실 간의 독특한 관계를 사유합니다. 영화는 판을 짠 사람들, 모린과 루슈가 기획한 것이 인터뷰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경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말미에는 제작에 참여한 자(내부)가 관객(외부)이기도 하고 비평가가 되기도 하며 이 세 가지가 분리되지 않는 실험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영화는 긴 노동으로 잠식된 삶의 여러 양상들을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이는 2024년 봄 우리와 뜨거운 밤을 보냈던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에 나오는 노동자들로부터 현재 우리에 이르기까지 노동과 맺는 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일찍 자야 한다거나 월요일을 위해 일요일 저녁은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24시간을 노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모든 것이 노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우애에 대하여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랑시에르가 들려주고 있는 목소리들이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해주는 것을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 본 푸코의 생각에 공명하는 이 책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단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노동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싣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우애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요. 우리는 흔히 우정을 서로 잘 공감하는 사람들끼리 가능한 무엇으로 여깁니다만, 사실 그것은 결국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찾음으로써 동일성의 회로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생각이 결코 같지 않은 누군가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함께 있는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만났다고 할 수 있고 우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에 대하여 (해방이란 무엇일까?)
오전 토론 시간에 2조에서도 유토피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특히 우리가 유토피아나 꿈에 대해 늘 결과적 차원에서의 실현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해 왔단 이야기를 했습니다. <프. 밤>의 노동자들이 꾸었던 꿈들은 그런 면에선 항상 실패했다고 볼 수 있고, 그 허황됨으로 인해 무력해 보입니다만, 중요한 건 꿈을 꿀 수 있는 - 견고한 분할선들 속에서 그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지워 보겠다는 - 용기와 그것에 내재한 강력한 욕망이 주는 능동성에 대해 배우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채운 샘께선 우리가 잠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찰나에 꿈을 꾸는 것처럼 꿈꾸는 시간은 결코 잠든 상태가 아니며, 잠과 깸의 분할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가장 능동적인 상태라고 말씀해 주셨죠.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의 꿈 아카이브’에서 그들의 능동적 주체화의 과정을 보았고 그 점을 우리와 나누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지만 그걸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꿈을 꾼다는 것이 허황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자리를 내어주진 않겠다는 것임을! 따라서 꿈의 반대는 결코 현실이 아니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시니컬한 목소리로 ‘무'를 갈망하는 것. 다른 말로 ‘절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끝으로 샘들 각자가 골라오신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아름다운 구절들을 띄워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자크 랑시에르 지음, 안준범 옮김, 『프롤레타리아의 밤』, 문학동네, 2021
(서문) 그들은 어떤 이들인가? 수십 수백의 프롤레타리아. 1830년경 스물이었던 그들. 이 무렵에, 저마다의 계산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않겠노라 결단했던 그들. 빈곤, 저임, 불편한 거처, 언제나 지척에 기아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예속의 힘을 지배의 힘에 무한정 연계시비는 것 이외의 다른 목표 없이 목수 일을 하고 철공 일을 하며 예복 재봉질을 하고 구두를 깁느라 매일매일 시간을 도둑맞는 슬픔을 더 이상 견디지 않겠노라는. 삶을 잃어버리는 이 노동을 하루하루 구걸해야만 한다는 수치스러운 부조리를 더 이상 견디지 않겠노라는. 또한 선술집 장정으로서의 허세 또는 성실한 노동자로서의 비굴함을 지닌 공장 안 타자들의, 자신들에게 넘어올 자리를 너무나도 기꺼이 기다리는 공장 바깥 타자들의, 사륜마차를 타고 가며 이 시든 인생에 멸시의 시선을 던지는 타자들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않겠노라는.
이들과의 결산이란, 왜 아직도 끝내지 못했는지를 아는 것이요, 삶을 바꾸는 것…… 세계의 전복은, 사유하기를 업으로 하지 않는 자들의 평온한 잠을 보통 노동자들이 누려야 했던 시각에 시작된다.
(19) “너는 내게 요즘 내 삶이 어떠냐고 물었지. 늘 매한가지지 뭐.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냉혹하게 되돌아보면 슬퍼져. 이 유치한 허세는 눈감아줘. 쇠를 두드리면서는 내 천직이 아니구나 싶거든.”
(39) 상상으로만 지옥을 아는 시인들에게, 머리로만 고통을 겪는 도련님들에게 노동일의 진짜 고통을 자각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보내는 작별 인사인가? 하지만 이 진짜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은 정확히 사유의 고통 아닌가? “이제 우리의 비애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논증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목수 고니는 부언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최고 슬픔은 보호없이 살아가도록 부모가 방치한 르네의 불행을, 뭔가 직업을 갖겠다고 결심할 수 없었던 오버만의 불행을, 세상이 할당한 자리에 비해 너무 광대한 정념을 지녔던 차일드 헤롤드의 불행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는 데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지옥은 모든 허세를 문 앞에 내려놓는 진실이 겪는 고통이 아니다. 그 진실은 가장 급진적인 허세요, 타자는 이 허세의 그림자일 뿐이다. 지옥에 대해 오직 그것의 그림자만을 아는 이들이 사실은 진짜 삶을 사는 자들이며, 이에 비해 작업장의 낮은 단지 꿈일 뿐이다.
(42) 따라서 시초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투쟁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의 비밀이다. “상품의 비밀”이 아니고. 상품에 낮처럼 밝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관건은 낮이 아니라 밤이요, 타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의 “비애”요, 모든 현실적 슬픔을 포함하는 창안된 슬픔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집어삼키려드는 것”에 맞서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착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와는 다른 것을 향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음을 드러내주는 자아 인식이다.
(44-45) “근대 산업 질서 개척자들의 규율 세계 안으로 진입 하기 위해 그가 댓가로 치른 수단 신기루들을 보라고, 저 다른 이들은 말할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부르주아를 사랑함과 동시에 그들과 투쟁할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교부와, 동방과 여성 메시아에 대한 생시몽주의자들의 사랑에 빠져듦과 동시에 생시몽주의 철도 제국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는가? 신도들 중 하나가 말하길 “이 사업을 지도하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에 감탄했지만, 그들의 시도의 결과물에 대해서나 드높고 거대한 일들을 그들이 정부에서 달성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불안했다.” 표상 세계가 조작하는 자와 조작되는 자로 나뉜다고 여기고 이 프롤레타리 아가 자기가 믿는 것의 호구임이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은 과연 실제로 얼마나 충분한 것인가? "미망"을 진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핍진할 뿐인 어떤 것이라고 말하려, 애써도 정의상 괜찮은 기이한 지형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미망 운운하는 모든 언술은 앎과 진리의 재배분을 대가로- 앞선 질문, 즉 세 영혼과 세 금속에 관한 "믿도록 하기가 불가능한" 신화 안에서 표현되었던 질문을 억제하는 기능을 갖는 것 아닌가? 신이 사유할 운명을 부여한 이들과 구 두 만들 운명을 부여한 이들을 분리하는, 정당화될 수 없으면서도 우회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한 질문, 이 경계는 이성 을 그것의 타자. 여백, 혹은 비사유로부터 분리해냄으로써 한정하는 분할은 아니나, 차라리 직조공을 모델로 삼으면 서도 배제하는 사유의 위엄을 부여하는 내제적인 경계. 그러니 아마도 인식의 남은 분할과, 계급부쟁의 이중적 영역 - 과학과 이데올로기, 권력과 저항 지배와 불복종 - 안에서 사유와 언술과 이미지를 정렬하는 새로운 분할 사이에 있 는이 일탈을 표시하는 모종의 내기가 있을 것이다.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자들의 밤,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의 언어, 아침이 필요 없을 만큼 잘난 자들의 이미지를 전유해내고자 하는 이 모험에서, 직조공과 제화공과 목수 와 대장장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신들의 말한 권리에 대해, 하나를 희생시켜야 다른 하나가 인정되는 분리 논리에 의해 이끌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해, 동시에 묻는 무대가 펼쳐지도록 하는 내기]. 착취로부터 계급의 발화로, 노동자 정체성으로부터 집단적 표현으로 곧장 뻗은 길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이러한 우회를 거쳐야만 한다. 이 혼종적 무대에 서 프롤레타리아 들은 자신들을 만나러 떠나왔고 종종 자신들의 역할을 전유하길 욕망 하는 지식인들과 공모하여 위 로부터의 말과 이론으로 시도해보고, 누가 타자를 위해 말한 권리를 갖는지 정의하는 낡은 신화를 재연하고 전위한 다. 노동자들의 위대한 집단성의 이미지가 묘사되고 목소리가 상징되는 것이 아마도 몇몇 특이한 정념, 몇몇 우발적 마주침, 신의 성별과 세계의 기원에 관한 몇몇 논쟁을 통해 비로소 보일 것이다.”
(112) “자기 손으로 노동해서 살아가는 자는 장인의 생각과 반대로 자기 일손을 부리거나, 또는 자기 노동의 물질성과 반대로 자기 생각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자가 정확하게 작성된 노동 의 장부에서 술수를 부릴 수는 없다. 그는 언제나 그 이상을 해야만 하고, 자신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유 보 없이 양도해야만 한다. 사유하는 프롤레타리아란 죽음 아니면 예속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형용모순이다.”
(115) “그러니 진짜 직업의 혹독한 조건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자유의 여백은 노동일과 연장과의 관계를 비껴 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 안에 설정되어야 한다. 연장은 예속의 도구이지만 그것 없이는 프롤레타리 아에게 독립이 있을 수 없는 최소 조건이다”
(116) 어떤 외관상의 소유.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불안전을 감내하면서인데, 이러한 소유는 자신의 도구들과 생산물 사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시간과 맺는 관계의 전복에서 우선적으로 생긴다.
(117)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과 자기 공간에서의 고독은 이러한 열기의 본성을 바꾸며(자유로운 노동의 열기로 예속적인 노동의 열기를 치료하는) 의존 관계를 뒤집는다.
(119) 종소리의 위압적인 울림에서 자유로워지듯 작업장이나 거리의 말들의 상스러움에서 자유로워지는 청각, 작업장의 단조로움과 장인의 시선이 유발한 증오에서 자유로워지는 시각. 마루 깔기 노동자의 영혼은 그를 둘러싼 광경들을 “거울보다도 더 잘” 반영한다. 그가 자신의 낮의 순수를 비루하게 하면서 밤의 순수를 얻을 수는 없다, 그가 곧 배제될 이 자리에서 절취되는 조화로움이 그를 꼭 자기집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자기집에 있다고 믿으면서, 마루에 깔 판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이 배열 작업을 좋아한다. 창문이 정원으로 나 있거나 그림 같은 지평을 담고 있다면, 어느 순간 그는 일손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광활한 전망을 향해 날아가, 결국에는 이웃집 소유자들보다 그 전망을 더 잘 즐긴다.
(138)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어떤 건물이 노동자의 적들에 의해 구상되지 않으며 지배계급을 위해 활용되지 않겠느냐면서,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하자면, 아마도 계급 분할이 아니라 실존형태 위계에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독방감옥은 임노동의 정상 질서를-이 질서의 용병들이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지옥의 마지막 서클을 건설할 정도로- 장악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용병들은 자신의 거부 역량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다.
(140-141) “노동에 대해 노동이 약속한 임금이라는 추상만을 알고 있는 이 노동자들의 무의식에 의해 좌절된 불가능한 꿈인가? 하지만 무의식이란 단지 단순한 부정이 아닌가? 언제나 거주하기 전에 먼저 그 장소를 벗어나는 이 건설자들에게. 유 배되는 이들의 고통을 누군가 일단은 보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을까? “노동자들이 억압 노동을 허용하기에 앞서 평의회를 형성했더라면, 그들 중 단 한 명이 그 노동의 혐오스러운 측면에 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모두에 게서 배척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논리는 다중을 비춰주면서 높이 올라가는 빛이다.” 불티 하나로 충분하다. 어디서 부터 논리가 의식의 빛과 반란의 불길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유명한 웅변가 하나가 감정 없이 이들 보조 간수들에게 장광설을 풀면서 그들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었으리라……” 우리의 마루 까는 노동자는 불행히도 웅변가가 아니다. 그의 반란을 키워낸 고독이 웅변을 단련할 대화를 아예 박탈하는데 어찌 그가 웅변가일 수 있겠는가? 우 리의 슬픔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그가 스스로 성찰하면 할수록, 그의 욕망이 미래 세대 공동의 영역들을 상상하면 할수록, 그의 말은 그들의 유토피아를 점점 더 서툴게 번역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군중에게 말하러 가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가 습관적인 걸음으로, 혼잣말하면서, 다만 평소보다는 좀더 크게 하면서, 도시를 횡단하는 것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장인들이 두려워하는 흠결이란 파리의 노동자가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으 니까 말이다. 구경거리는 노동자의 양심을 잡는 덫이다. 민주주의자는 혼잣말하면서 도시를 횡단한다. 그가 독백으로 내뱉는 구절들이 행인들의 호기심을 끈다. 행인 각자가 거기서 어떤 진실을 포착한다. 멈춤 없이, 그는 그들의 실존의 상처를 건드리며, 이 상처는 장인의 이익을 감퇴시킨다…… 바람에 실린 이 말들을 듣고, 군중은 이 혁명가를 에워싸 니, 그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중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다.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불고, 독방 지옥에 대한 묘사를 듣고자 몇몇 건설 노동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틀림없이 석공들에게는 별로 없는 기회들이다. 그 들은 노동에서 일탈하는 것을 삼가며, 흔히들 무리 지어 셋방으로 귀가한다. 하지만, 어느 목수에게도, 어쩌면 어느 철물공에게도,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162) 이에 해당하는 것이 목수 고니와 부기 담당자 티에리가 1831년 겨울의 한기 속에서 찬양한 순결한 서광이다. 자신을 갱생시켜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세 친구에게 고니는 꽃이 이슬에 바치는 찬가로 화답한다. ”너의 서광이 내 얼굴로 쏟아졌을 때, 네 삶의 이슬이 돌풀이 몰아치던 내 땅 위에 떨어졌을 때, 나는 여기 있지 않았어. 내 존재의 반란에서 벗어난……나는 스스로 꽃이 되었지. 너 하나를 위해서만 향기를 품은, 내 꽃잎들을 따는 너의 숨결에 부딪힌 사랑스럽게 홀로 핀 꽃이.” 하지만 이슬은 결코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떨어지는 법을 알지 못하며, 꽃은 다른 꽃들로부터 자기 향기를 숨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식물은 고통의 치유를 삼가는 법을 알지 못한다. “생각하는 둘”인 두 젊은이가 자신들의 서광에 대해 느끼는 감격에 제화공 부알로를 연계시켜 “결합된 셋”이 되는데, 이들이 새로운 우애의 종교에 건배할 수 있으려면 자신들의 몽상적 산책의 바람결에 이 종교를 실어 퍼뜨려야만 할 것이다.
(267) 지상의 크리스마스. 하늘의 노래, 모래사장과 산을 넘어가서 독재자들의 도주와 새로운 노동의 탄생에 환호하는 인민들의 행진…… 이 모두는 거짓. 훨씬 오래된 후렴구들만 살짝 섞인 잘 학습된 것들. 게다가 이에 대한 보상은 앞당겨 받게 된다. 『글로브』의 식자공 또는 배달꾼 자리로, 연합체 건물 수위 또는 몽시니가의 하인 자리로. 예복과 모자 주문, 의자 수선, 도장 작업, 집세 선불, 전당포 상황 등으로 …… “빵을 얻기만 한다면 그들은 어떤 교리든 다 고백할 것이다.”
(320) 애벌레에서 나비까지, 센강가에서 레테 강가까지, 번데기의 여정은 나일강을 거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성모를 찾겠다고 결심한 사도 모세가 친구인 목수 가브리엘에게 자신을 전범 삼아 따르라고 헛되이 재촉한다.
(349) 이는 생시몽주의 사제들의 신비주의적이고 감각적인 산문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신봉자들이 자연종교의 몽상 또는 공화주의적 정념의 열기와 합치시키고자 하는 말과 표현 또한 아니다. 어휘가 다르다면, 그것은 노동자 사도들의 상상 세계가 변했기 때문이다-어쩌면 인민의 생활 조건들보다도 더 빠르게.
(468) “왜냐하면 만약 수익이 난다면, 이는 둘 중의 하나이니, 생산자가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소비자가 너무 비싸게 낸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 당신들에게 주어진 소비자의 조건은 흔히들 어떠한가? 프롤레타리아라는 조건. 프롤레타리아들을 더 잘 해방하기 위해 그들을 착취한다는 이 원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468) 하나의 다른 세계. 분유되는 빈곤이나 공동의 착취가 아닌 경제 관계들의 형식 자체 안에서 우애를 정초하는 세계. 생시몽주의 기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신의 우주에 대립되는 교환 세계. “역으로, 다른 세계를 떠올려, 누구든 빌려주고 누구든 빌리는 세계. 모두가 채무자요 채권자인, 천체의 규칙적인 운동은 얼마나 조화로운가! …… 자연은 빌려주고 빌려오기 위해서만 인간을 창조하니까.”
(567)
“ 낮은 지고 곧 흐릿한 밤이
내가 파고드는 꿈을 근심들로 덮을 거야
아직도 숲속에서, 매혹당한 시선으로
나는 보네, 죽어가면서도, 자유가 전진하는 것을.
자유가 돌아서며 건넨 작별 인사가 내게 주네
내가 버려야할 오류의 지표를
... ”
(576) 유토피아적 희망의 유산은 이 희망의 불모성을 보여주는 것, 이 희망을 포기하고 과학의 확실성을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것과는 실제로 거리가 매우 멀다.
(577) 신세계는 저 먼 땅인 이집트의 사막이나 텍사스의 숲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신세계는 매일매일 우리 눈 밑에서, 우리 머리 안에서 형성된다.
(579) “자신을 벗어나 타인들을 위해, 또는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세계 안에서 산다는 것이 주인 없이 살 아가는 자의 향락을 느끼기 위한 조건이었다. 유토피아를-자신을 위해, 그리고 타인들을 위해-꿈꾸는 삶은 미망들에 대한 명석한 분석과 대립하지 않으며 그 것에 압도되지도 않는다. “제가 현실보다는 꿈으로 더 많이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나이들어 정념이 수그러든 지금, 나는 미망들이 두렵고, 미망들을 분석함으로써 깨뜨립니다. 하지만 나의 환멸에 색을 입히고 나를 지탱해주는 낙관주의를 충족시줄 만큼의 미망은 아직 남아 있지요.”
(580) 유토피아를 치료할 수 없는 신경 장애는 시력 상실이 유발하는 환각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역으로, 오직 실명만이 이 유토피아주의자를 지상으로 되돌리고,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삶의 소소한 욕구들과 소소한 욕망들의 위생을 그녀에게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10주차(4/20) 공지]
1) 팀별 에세이(5장 분량)를 19일(금) 저녁 10시까지 올려주시고, 팀별로 각각 23부 출력해 주세요.
2) 간식-후기-정리는 제현샘, 승현샘, 나연샘께 부탁드려요.
우주의 기운을 모아 모아 에세이로 💜
언젠가부터 꿈이나 비전을 얘기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마저 조로현상인건지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뭐든 다 부질없다는 듯이 얘기하지요. 뭔가를 향해 노력하는 건 야망이나 이기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형식이 널리 퍼져있기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를 욕망하는 게 어떤 경지에 있거나 무욕하며 자족하는 삶이라고 간주하시고 하네요. 이번에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노동자들의 꿈과 활동이 굉장히 인상 깊었고, 그 안에서 발생한 다양한 고통과 갈등, 분열도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샘들이 뽑아주신 멋진 문장을 읽으니 프밤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네요. 외부에서는 우리의 공부가, 글이 쓸모없고 현실적이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비전을 계속 실천해 나아가 보아요. 2024년 사람들의 꿈, 아카이브를 구성할 에세이 홧팅입니다. 😊 여러모로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 핵심적인 내용과 정성이 담긴 공지 넘넘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