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이어지고 생-기 세미나는 쭉쭉 나아갑니다. 이번 주에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와 아리엘 키루의 대담집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를 읽었습니다(후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스티글레르는 첫 번째로 읽은 텍스트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에서 소개되기도 했었는데, 대담으로라도 그의 사상을 만나게 되니 신선하고 현실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키루는 그를 ‘소크라테스 같다’고도 말했는데요. 확실히 “힘이 있으면서도, 완고한 기술혐오증에 빠지지 않는 다른 유형의 비판적 사고”(16쪽)가 느껴집니다. 생-기 세미나원들도 모두 재밌게 읽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텍스트에 대한 개념들은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세미나 때 나눴던 주제들을 간략히 스케치해보겠습니다.
일travail 과 고용emploi : 우리의 ‘할 줄-앎’과 ‘살 줄 앎’을 위하여
‘우리가 스티글레르가 말한 일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세미나의 서두에 동현샘께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취업난, 고용난, 일자리 감소 등 온갖 불안한 얘기가 들려옵니다. 고입과 대입부터 취준까지 경쟁의 열기가 뼛속까지 자리 잡은 시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앞날도 예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꿈꾸는 건 좋은 곳에 고용되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가는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 고용은 20년 안에 급격하게 파괴되어 가리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하지만 스티글레르는 고용의 죽음은 어쩌면 희소식일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왜냐, 고용 속에서 이뤄온 ‘정신의 자동화’와 싸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드디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비자동화’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맞닥뜨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를 따라가려면 그가 고용과 일을 구분하는 방식을 참고해야 합니다.
스티글레르에게 일과 고용을 구분하는 기준은 역량과 앎의 ‘긍정적 생산’ 있습니다. 고용은 “그 본질이나 특성이 어떤 것이든 간에 노동자들이 급여를 받는 활동”(14쪽)입니다. 고용된 사람은 무언가를 반복하지만, 기 업무가 무엇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생산하는 것의 배치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가령,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졌을 때 중책을 맞은 관료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상황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용은 고용된 자는 나사못이자 톱니바퀴로 만들며 기계부품화합니다. 이는 돈벌이 활동의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면모이지요. 주체는 능력과 지성을 박탈하는 착취당하고 나날이 쪼그라듭니다. 궁핍하게 되고 바보가 됩니다. 반면 일은, 말하자면, 자기 고유성의 실현입니다. 보수를 받든 안 받든, 기계를 사용하든 안 하든, 자신이 생산하는 산물과 그 전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는 활동이 일입니다. “오직 나의 개인화에 이바지하는 활동, 나의 독특성은 물론이고 내 곁의 타인들, 내 재능의 혜택을 입는 동료들 및 일반 시민들-고객이 아니라-과 같은 타인들의 독특성을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는 활동만을 일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는 것”(14쪽)이죠. 우리는 일을 할 때, 어떤 기술을 통해 매개된 기억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이전의 습관적 반응양식을 벗어나고 그만큼 창의적이 됩니다. 이를 ‘비자동화’라고 합니다. 비자동화란 자동적인 것을 내면화해 자기 식으로 바꾸는 과정, 개인의 해석과 종합을 거치는 창조이자 숙고와 성숙의 과정(135쪽)이지요. 일은 탈개인화인 동시에 개인화가 벌어지는 사건, 즉 통-개인화(통-개체화(transindividuation)입니다. 악기를 연습할 때,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작업을 구상할 때, 그로부터 우리가 확장되고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과 더불어 우리는 ‘할 줄-앎’과 ‘살 줄-앎’을 키워갑니다.
그런 점에서 고용은 일을 파괴해 왔으며, 자동화 시대에 고용이 파괴될 때 우리는 다시 일을 조직할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기여 소득’과 우리의 상상력
“일자리를 갖지 못해 실업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고용된 사람들, 즉 봉급생활자들을 위해서도 수당 지급을 고용과의 관계에서 결정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 이제 돈을 주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111쪽)
스티글레르는 당차게 말합니다.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얘기하는 실업을 없애는 아주 좋은 방법은 고용을 없애는 것이라고요. 고용이 없다면 실업도 없습니다. 사실상 실업이라는 것은 ‘고용 모델에 따라 구상된 노동권 그 자체에 의해 규정되는 결핍 상태’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수나 놈팽이라는 말은 모두 고용이 최고라는 관념에서 생겼습니다. 즉 ‘일’에 대한 우리의 좁은 상상력이지요. 사실 우리는 일을 해서(즉 고용이 되어서) 자기 밥벌이를 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을 부품화하는 경제의 논리에 가담하게 됩니다. 가치를 매기는 다른 방식, 그래서 돈이 흐르는 다른 방식을 고안해야 합니다. 임금 제도는 너무나 편협합니다. 정당했던 적이 없습니다. 페미니즘 사상가 뿐 아니라 일리치 같은 철학자들이 그토록 외쳐왔음에도 지금껏 가사 노동의 가치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환경 파괴 비용 및 디지털 영역에서 네트워크 이용자들이 생산하는 인지 노동 역시 포함하지 못합니다. 기여는 곳곳에서 일어나지만 임금은 아주 좁은 곳에만 매겨집니다. 그것도 인간의 창의력과 자유를 억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곳에만요.
기여 소득은 시혜가 아닙니다. 가치를 매기는 편협함을 벗어난다면 너무나 당연한(그리고 뒤늦은) 지급입니다. 저희는 전장연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해고 복지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도 노동이다’라는 구호는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행사에서, 모임에서, 책에서 자신들의 삶을 말하고 사회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시대의 인프라가 너무나 비장애중심적으로 짜여 있으며, 우리는 누구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인식하게 ‘기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살 줄-앎’의 폭을 넓히고 ‘할 줄-앎’의 벡터를 바꿉니다. 그렇기에 ‘실용적 가치’가 있습니다. 결코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로 책정될 수 없는 더 중요한 가치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규문에서 받는 활동비 혹은 규문 선생님들이 글을 게시할 때 받는 원고료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살 줄-앎’과 ‘할 줄-앎’을 실험하는 것은 ‘살 줄-앎’의 발명을 위한 충분히 자긍심 가질만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저희는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는데요. 남순샘께서 젊은 세대에 대한 애정의 눈빛으로, 기본서독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삶을 꾸리고 싶은지를 질문해주셨습니다. 아직 사회에서 돈벌이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봄샘이나 동현샘은 구체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취업 경쟁에 대한 압박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비슷한 기여소득 속에서 살고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기본소득이 있다면, ‘먹고 산다’는 명분하에 부차적인 것으로 미뤄두었던 문제들에 집중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경문제를 비롯해 난민, 장애, 전쟁 같은 이슈들의 역사와 배치를 공부할 틈이 생길 것 같습니다. 물론 사이사이로 아름답지만은 않은 욕구와 게으름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어쨌든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여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무작정 ‘많은 돈’ 혹은 ‘계속 이자가 들어오는 투자자본’의 확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비용으로 삶을 꾸려가는 지혜가 자라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살림을 꾸리는 경제실험, 양생실험, 공동체실험이 생길 것도 같습니다. 스티글레르의 표현으로는 ‘구매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구매지’를 늘리는 방향으로요. 디지털 세계에서 그런 세상은 사실 유토피아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공부를 더 해가고 싶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내일 4/20) 공지입니다
-<페미니즘과 기술> 1부와 2부(6~105쪽)까지 읽고 과제를 적어 옵니다.
-이번 주 과제의 방향입니다.
1)주디 와이즈먼이 테크놀러지를 문제화하는 방식을 정리하고
2)테크놀러지와 젠더의 관계를 어떤 관점에서 맥락화할 수 있을지생각해봅시다
민호쌤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