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니체 ‘현전적 진리가 없는 기호’를 이해하고자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보여주는 해석기술은 충격 효과를 가져오며, 질병을 일으키고 개인적으로 자극한다고 한다고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의 저자인 에른스트 벨러는 말하고 있는데요. 푸코는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이성을 “우연에 의해” 세상에 도래한 것으로, 의지에 관한 학설은 “지배 계급의 발명품”으로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푸코는 이런 니체의 계보학적 분석은 사물을 외관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라고 하는데요. 푸코에 따르면 니체의 계보학적 분석은 사물들 배후에 은밀한 무시간적 본질은 없으며 아무런 본질도 없다는 것이 사물들의 비밀임을 드러내는 것이자, 사물들의 본질이란 이질적인 형상들로부터 조금씩 조합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보학은 근원에서부터 유지된 동일성 대신 ‘불화, 부등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떤 계통의 과정을 추적한다는 것은 분산 속에서 유지된 우연한 일들이나 사소한 일탈, 혹은 이와 반대로 계속 존재하고 있으면서 가치가 있는 것들의 유래가 된 오류, 그릇된 평가, 잘못된 계측의 고찰이지요. 따라서 이런 계보학은 ‘진리와 존재’란 ‘자신의 뿌리가 결코 아니고 우연한 일들의 외면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요.
저자는 이러한 분석은 데리다가 말한 ‘현전적 진리가 없는 기호’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합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형벌의 기원과 목적이 일상적으로 하나의 문제로 다뤄지고 있지만 세심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우리는 보통 복수의 “목적”을 복수나 경고로 보고 이로부터 그 기원을 설명해내려고 하지만 “발생 원인이나 궁극적 효율성은 사용과 목적 체계의 위치와는 분리된 세계”인 것이지요. 니체의 “계보학”의 관점에서 보면 형벌과 같은 현상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종합”을 소유합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모든 단어는 주머니’라고 하는데, 주머니엔 한번은 이것, 한번은 저것, 어떤 때는 몇 가지 것을 한꺼번에 넣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니체는 “우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마련”했고 “입체, 선, 면...”과 “같은 내용을 가정”했다고 하는데요. 이 “믿음의 품목”으로 인생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품목들이 증명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즉 삶은 논증이 아니며, 삶의 조건들 중에는 오류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니체에게 세계를 “인간 사유에, 인간의 가치 개념들에 그 등가물과 척도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즉,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궁극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신병의 소행이거나 우둔함이었습니다. 니체가 세계는 “사실이 아니라 빈약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서 매끄럽게 지어낸 시적 창작물”이자, “변전하는 무엇으로, 결코 진리에 가까지 가지 못하면서 늘 새롭게 변모하는 거짓으로서 ‘강물 속에’ 있다고 합니다. 니체에겐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풀지 못했던 ‘현전’이라는 말의 의미가 니체가 없다고 말하는 ‘진리’의 의미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물의 배후에 무엇이 있다는 감각이나 기원과 목적을 하나로 보는 보는 것, 단어를 하나의 의미로 확정하는 것, 삶을 논증의 영역이나 인간인식의 등가물로서 세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 등.
데리다는 니체의 상을 ‘기호’와 ‘증후학’에서 찾아 그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네요. 니체의 기호는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현전적 진리, 궁극적 의미로 확정될 수 있는 일체의 진리를 결여’하고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해석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해요. 초월적 기의와 같은 확실한 근거에 의존하지 않는 해석은 끊임없는 암호 해독, 무한한 해석으로 작동한다고 하는데요. 니체가 실천한 이러한 해석 방식은 세계를 놀이로서 긍정하는 태도이자, 이러한 사유에 어울리는 글쓰기 또는 양식은 “복수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복수로”. 데리다의 ‘증후학’이란 니체에게서 나타나는 특이한 구상인데요, 간계나 위장 같은 현상들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그 진단이 일반적으로 예상했던 것, 가장 분명한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귀결됨을 말한다고 해요.
지난 시간에 풀어보고 싶은 말들이 많이 나왔지요. 데리다가 니체에게서 주목한 ‘기호, 해석, 놀이, 양식’이라는 말들, 증후학 외에도 ‘가면’, ‘예술을 위한 예술’, ‘문체’ 등. 가면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들을 좀 후기로 쓰고 싶었으나 오히려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알 것 같으면서도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데리다-니체 데리다-니체』는 참 맛있습니다. 니체에 대해 갈증이 났던 부분을 잘 짚어주고 있어 너무 반가운 맘이 들지요. 하지만 막상 그것을 말로 글로 언어화하고,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놀이’를 하기엔... 역부족이네요. 하지만 그 부족함이 또 즐거운 맛이기도 합니다. 세미나가 끝나면 시간이 부족한 듯 해서 아쉬움이 들지만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다음 시간까지 남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은 맘을 갖게 하지요. 데리다 2회차에 얘기를 나눴던 ‘현전’이 지난 3회차에 조금은 이해되는 것이 그런 예지요. 돌아오는 내일 데리다 4회차에는 또 어떤 것이 조금 더 형상을 갖게 될까요. 당일 내려가는 길에후기를 써보라던 승연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후기를 올리네요. 지켜봐 주시는 승연샘 죄송.ㅎㅎ. 모두들, 내일 만나요!
경희샘! 연이은 에세이 주간에도, 후기 놓치지 않고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데리다-니체 데리다-니체』는 참 맛있습니다."라는 경희샘 말이 저의 마음이기도 해요. 뭔가 풀리지 않지만 이전에 니체 텍스트만 단독으로 읽을때 (니체의 이야기가 온통 추상적인 언어로 다가왔었는데)와는 다른 느낌(기호로서 언어, 문체들이 이루는 놀이,해석 )으로 매번 다르게 다가오고 있거든요. 그리고 어설프지만 세미나에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에서 '니체의 사유' 를 다르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제 마지막 4장을 남기고 있네요. 4장 "해체론"에서 어떤 해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좀 이따 봬요^^
경희샘. 후기 잘 읽었어요. 이번 시간에도 가면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풀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우리에게 답답함이 좀 있었지요. 담시간에 우리의 채운쌤께서 질문을 받아주시고 함께 해주신다고 하니 우리의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겠지요. 우리 함께 더 맛있게 공부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해요.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그 먼 남원에서 올라오시는 선생님... 계속 응원하며 지켜봐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