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는 18세기 프랑스 사람 앙투안 갈랑이 쓴 책입니다. 출처는 인도 설화집이지만, 이집트, 아라비아, 티르키족, 페르시아, 인도 북부 쪽까지 아우르는 인간의 공통적인 심성, 생활양식 이런 걸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과제 써 온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 이야기의 힘, 정령, 호기심, 여성, 상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한 학인은 선악의 기준도 별로 없고,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니까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교훈을 전달하는 것의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인간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 할 수 있는 사악한 정령이나 마법 같은 얘기가 재밌었다고 했죠. 또 하나의 이야기는 페르시아의 왕인 샤리아가 아내인 왕비가 범한 부정을 목격하고 분을 참지 못해 해결한 방법이. 매일 밤 한 명의 여인과 결혼하여 같이 자되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에는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복수라는 방법에 끔찍하다고 말했지요.
이 야만스러운 행위를 중단시키려고 재상의 딸인 세에라자르가 왕에게 이야기를 무기로 술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들어가겠다는 부분에. 대체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세길래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그거 하나를 믿고 그렇게 들어가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로 그냥 하지 말라고 해도 될 것을 이야기로 길게 들려주면서 전달한다는 게 흥미로웠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우리는 토론을 통해 나온 나온 질문이 대체 이야기란 게 뭐냐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야기는 힘이다, 맥락 전체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불필요한 과정을 겪으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 지었습니다. 이것에 미진한 것을 선생님의 강의로 보충했습니다.
“<천일야화>는 이야기의 존재론과 연관 시켜서 많이 얘기한다. 이것을 압축하면 천일야화의 주제가 글쓰기와 죽음이다. 이야기는 필멸 성을 깨달은 인간들이 자신의 필멸 성에 대한 보복, 그 필멸 성에 대한 저항으로 발명한 것이 이야기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남기는가. 존재는 안 나오고. 근데 이야기는 남지. 천일야화의 구조가 자신의 죽음을 미루는 거, 하루하루 유예하는 거. 이야기의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하룻밤이 유예되고.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 이야기란 필멸하는 인간보다도 더 멀리 더 길게 가는 게 아닐까. 텍스트의 존재론이고, 텍스트의 힘이기도 해요.”라는 내용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슬람을 이해할 때 이슬람 종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아라비안반도 지역에 너무나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네요. 그러다 보니 생겨나는 여러 가지 반목이나 수니파, 시아파로 종교 파가 나뉘어져서 싸우게 된다는 거예요. 이런 게 아마도 장사를 하는 데도 방해가 됐나 봅니다. 그러면서 그 세계를 통일하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이 무함마드라는 사람에게 강렬한 열망을 지닌 인간에 의해 표출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태어나서 신의 계시를 받은 사자이면서 예언자입니다. 계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예언자. 예언자는 아무나 안 된다죠. 기도를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답니다. 그런 신체적인 것을 극도로 절제한 상태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리니까요. 무함마드가 희라 산 동굴에서 신의 계시를 처음 받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록의 모음집이 바로 『코란』. 이슬람교도들은 이 코란을 다 읽는다고 해요. 재밌는 것은 신의 첫 예언이 다짜고짜 “읽어라!” 했다는 거예요. 『코란』의 어원이 카리나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카리나라는 말이 아랍어로 읽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글을 모르고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부인의 지원과 조언으로 글을 배우고 신의 계시를 듣고 그것을 기록합니다. 그 과정을 자기 부족들에게 알려 나가고 나뉘어져 있던 부족 국가를 하나의 단일한 믿음에 통일체로 형성된 통일 부족 국가로 그 공동체를 단일한 신을 모시고 단일한 사상과 단일한 서로 간에 통일적인 신뢰를 할 수 있는 체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로 형성케 한 게 무함마드가 한 일이었습니다.
세에라자드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술탄에게 들려주면서 바라는 것은 뭘까? 아마도 술탄이 겪은 불행이 혼자만 겪는 특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싶다. 그러니 흔해 빠진 불행의 기억으로 괴로워 말고 술탄 삶의 평화를 흔드는 일은 그만 멈춰달라고 하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리라.
'죽음을 유예시키는 이야기'란 패턴은 셰에라자드와 술탄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계속 변주되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죽음을 유예시켜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필멸하는 인간보다 더 멀리, 더 오래 갑니다. 어제 토론에서도 이야기가 나왔던, '이야기를 황금으로 기록해서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도 어쩌면 인간의 필멸성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무함마드 예언의 첫 마디가 "읽어라" 였다는 것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어', 순종을 요구하는 것과는 신과 다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읽는 행위는 엄청난 자기 변화를 요구합니다. 읽기는 책과 자신이 서로 녹아드는 과정을 말 할텐데, 이는 자기 세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남은 기간 잘 붙들고 싶은 키워드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빨리 죽는 인간들이 필멸성에 대한 보복과 저항으로 이야기를 발명했다는 게 뭔가 좀 심오하면서도,, 웃깁니다,,ㅋㅋ 어떻게 해서든 그 흐름에 거스르고 뭔가를 남기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요. 단테도 자신의 저승 여행을 글로 꼭 남기고 싶어 했었지요. 문자를 통해 이어지게 하고 싶었던 건 어떤 '정신' 같은 거였을까요? 천일야화에선 유독 놀라운 이야기들을 꼭 남기고 싶어 하던데.. 인생 사는 데 도움되는 교훈이나 지혜 같은 게 아니라 왜 놀랍고 기이한 이야기를..?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느낌이었을까요? 세계의 신비를 남기고 싶었던 건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