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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모어니체 / 8주차 후기
<데리다 니체 니체 데리다(에른스트 벨러)>의 ‘제4장 니체-데리다’에 관한 세미나의 후기를 쓰려고 하니, 뭔 소리를 해야할지 고민이 됩니다. 우리의 대화들을 정리하려해도 우리의 대화가 “제가 이해한 니체”로는 니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니체 텍스트의 전체성’이라는 것은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 역시 단편적이고 잠언적일 뿐(p183)”‘이라는 텍스트는,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발제하고 주요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놀이를 통해서 해석자를 자극하고 무력하게(p181)‘ 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놀기는 했을까요? 아니면, “검토와 전유와 동일화(p175)“를 반복한 것에 불과할까요? 그 어디쯤 있었을까요?
데리다는 1972년 7월 강의에서 “새로운 언어학과 ‘해체론적 텍스트 독법의 성과를(p167)‘ 니체 해석에 적용”했다고 합니다. 해체론적 텍스트 독법은 무엇일까요? 그 흔적들이 책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책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하며 해석해내야 했었습니다. 이번 장의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니체를 읽으며 ‘니체의 단편과 잠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해체론적 텍스트 독법”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늘 뭔가의 통일성과 정답, 진리를 찾아가는 경향이 있는 저로서는 꽤나 어려운 지점입니다. “해체론적 텍스트 독법”을 찾으러 안개 속을 더듬어 어렴풋이 이야기 하려면, 니체의 ‘여성’을 읽는 법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니체가 여성에 관하여 적은 것은 모순적이며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상충되는 부분들에 어지러울 지경인데, 여성을 고정된 하나의 기호로, 통일된 의미를 지닌 진리로 여긴다면, 우리는 니체의 글을 읽다가 그에게 분노를 느끼며 책을 찢어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니체의 여성을 ‘우화(p176)’들의 향연이자 “텍스트의 이질성(p174)”의 이용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니체의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p175)’ 속에서 유희하며, 여성은 ‘진리의 비진리를 위한 이름(p171)‘일 뿐이라며, 삶의 여러 모습과 형태들 속에서 니체의 ’여성‘을 읽어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읽는 것이 해체론적 텍스트 독법이 아닐까요?
데리다의 1976년 세미나는 서명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서명? 서명이 뭐길래 서명을 텍스트의 기점으로 하였을까요? 원모어 니체-우리의 대화가 서명에 관하여 공통된 의견을 보인 부분은 ‘서명이 다른 사람의 귀‘로부터 생겨난다는 점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서명은 텍스트를 작성한 저자로부터 시작하여, 텍스트를 읽는 수용자 측까지도 포함하여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텍스트는 ‘아직 완결되지 않(p189)‘았으며 수용자들에게 열려있어 그들에 의해 해석되고, 또다른 미래의 생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그 텍스트 자체는 니체라는 작가의 꼬리표(서명)가 있지 않다면, 니체라는 뉘앙스를 담는 텍스트(예 :데리다는 “<이 사람을 보라>의 장면에서 니체를” 읽으라고 제안한다 p192)를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텍스트에서 여백은, 가능태로 작동합니다. 텍스트에 여백은 ‘텍스트의 몸통과 저자라는 개인 사이에서 생겨나야(p192)’하는데, ‘가면과 시뮬라크르’ 가 만들어내는 여백으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들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뤄진 삶을 또한 해석해낼 수 있게 할겁니다. 여백은 꽉 짜여지지 않은 비체계적으로 구성된 텍스트 사이에서 생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이데거는 니체라는 이름을 지나가거나 종결된 사건, 확정되고 정의되고 분류될 수 있으며 결말지어진 일에 결부시키는 반면에, 데리다는 그 이름을 예견될 수 없고 결코 종결되지 않을 미래에 연결시키고 있다(p204)’ 라는 문장은 니체에 관해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삶을 살아가면서 주고 받는 여러 기호들을 해석하는데 스스로와 타자에게 이전보다 더 넉넉하게 자유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장에서 니체의 텍스트를 종결되고 확정적인 것으로 보는 전체성의 사유(하이데거)와 텍스트의 무한한 암호해독과 같은 능동적 해석, 해체론적 사유(데리다)를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니체의 사유가 많은 부분에서 여러갈래로 해석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들었어요. 그 중에서 에른스트 벨러는 데리다의 해체론적 글쓰기(?)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철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어요. 누구의 사유든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그 '철학자의 고민지점이 무엇이었나?' 이런 부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때 니체가 말한 "서명"이라는 것이 "아직 완결되지 않"은 텍스트로서 작동하는 것 아닐까요. 어느 지점에서 저자의 사유가 멈추지 않고 그너머를 사유하게 하는 그런 "서명"으로. 그리고 동시에 삶(개인)과 텍스트 사이 "여백"이 생겨나것 아닐까요. ㅋ 영아샘의 후기를 읽고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고민과 애씀이 담긴 후기 감사해요(^^)
서명이라는 고유명사의 사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우리가 알고있는 말의 용법으로 쉽게 회귀할 수 없는 '데리다-니체' 읽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해체와 해석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막면하게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