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천일야화> 2권을 읽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1권보다 재미있게 읽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요. 2권에는 ‘상인’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유명한 ‘신드바드 이야기’가 3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 이야기들에서도 상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인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문을 남기려고 아득바득 애쓰지도 않고, 벌어들인 돈을 혼자서만 독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신드바드도 긴 항해 끝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토론에서는 상인들의 이러한 태도가 ‘부(富)’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온 듯하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한 결과로 보는 반면, 그들은 우연의 산물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태도가 이슬람교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현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시험’으로 생각한다고 하지요. 신이 베풀어주신 것을 내 것인 양 혼자서만 독차지한다면 그건 신의 시험에 실패한 것이 됩니다. 이슬람교의 다섯 의무 중 하나인 ‘희사(喜捨)’는 기쁘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천일야화>와 함께 읽고 있는 <이슬람의 문화> 통해 만나게 된 ‘이슬람교’도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유일신’을 주장하는 종교이고,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지만, 다른 점이 적지 않습니다. 세 종교 모두 ‘전지전능한 신’을 모시지만, 이슬람의 신 알라의 ‘전능성’은 앞의 두 종교를 능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체 만유의 창조주’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지만, 알라는 세계를 한번 창조하고 난 뒤에도 “줄곧, 지금도 여전히 모든 존재를 엄격히 관리하고 지배하는 주재자”(<이슬람의 문화>, 73쪽)입니다. 세계는 과거에 한번 창조되고 그 후부터 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는 겁니다. 매 순간의 창조 행위가 이어져서 세계와 인간의 역사가 형성됩니다. 그 전체는 하나로 이어진 흐름이 아니라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독립된 단위들이 연속된 것”(74쪽)입니다.
‘이슬람의 아토미즘’, ‘원자론적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이런 관점은 또 하나의 독특한 점입니다. 이 점은 이슬람교의 신을 더욱 절대적인 신으로 만듭니다. 모든 일은 신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신의 말씀을 기록한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뿐이죠. <천일야화>가 이슬람의 문화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우리 시선으로 볼 때 특이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이슬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토론과 강의에서 언급되었던, 당시 ‘상인’이라는 직업에 관한 규정들도 흥미롭습니다. 당시에는 상인이 물건을 ‘파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떠돌면서 물건을 ‘이동시키는’ 사람에 가까웠다고 하지요. 어떤 물건이 어디에서 생산되고 어디에서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내어, 물건과 필요한 사람을 이어주는 자. 이들에겐 떠도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 과정에서 별의별 일들을 다 당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도 하죠. 그러니 상인들은 ‘모험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도 오래 참지 못하고 또다시 길을 떠납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모험을 자꾸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떠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떠날 수 있었을 거란 얘기도 있었죠. 떠나는 자 신드바드와 떠나지 못하는 자 힌드바드의 대비, 유목하는 삶과 정주하는 삶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2권은 유난히 만화 같은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어 킥킥거리며 읽었는데요, 3권은 또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를 사로잡을지 기대되네요!
***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 <천일야화> 3권을 읽고, 나누고 싶은 문장과 그 이유를 간단히 적어 숙제방에 올립니다.
- <이슬람의 문화> 2장 절반(~128쪽)을 읽어옵니다.
- 2주차 후기는 은옥샘, 3주차 간식은 경원샘.
내일 역사 세미나에서 만나요!
오늘 세미나에서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슬람에선 신과 나의 관계가 정말 강력하고 절대적인 것 같아요. 성자와 같은 대리자를 거치지 않고 1대1 다이다이 관계라서 더 그럴 수 있나 싶습니다. 매순간 신 속에서 살아가는 그 느낌이 어떨지... 은옥샘이 보셨다는 라마단을 대쪽같이 지키던 무슬림 성생님이 떠오르네요..!(아 혹시 그 아랍인 친구분 이신가요?)
매순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창조 행위로 보는 이슬람과, 빈약한 인과를 구성해보거나 별 생각 없이 보는 우리 중에 누가 더 미개한 것인지? 라는 채운샘 질문도 생각납니다. 뭘 기준으로 봤을 때 '미개하다'란 시선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지진은 알라의 뜻'이라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아직까지는 확실히 그 시선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천일야화를 훨씬 무한에 가깝게 읽고 있었는데, 이즈스도시히코 책에서 '이슬람의 아토미즘' 부분을 읽으면서 아차! 했습니다. 비균질적인 <천일야화> 안에서는 원자론적 존재론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좀 더 신중하게 봐야겠네요.
그러니까요.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떠나고자 하던 신드바드의 마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