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지혜+헤르메스팀도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학기는 시작이라 그런지 의욕이 충만했는데, 학기 끝나고 2주 쉬다가 나가려니 은근 귀찮고, 공부는 왜 꼭 해야 돼? 라는 하나마나 한 생각이 슬쩍 올라 오더라구요. 다행히 간식 당번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바리바리 싸들고 규문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듭니다. 그런 제가 오전 오후 모두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신나게 떠들었네요. 저뿐만 아니라 다들 쉬는 걸 까먹은 듯했습니다.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저희를 이끌어주는 거 같습니다.
<오전시간>
원래 『디가니까야』를 읽는 시간인데 이번에 너무 분량이 많아서 오후 시간으로 미루고, 세르의 이번 2학기 텍스트인 『헤르메스』의 머리말 부분을 같이 훝어 보았습니다. 짧은 분량이라 다같이 꼼꼼이 읽으며 세르의 의중을 해독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헤르메스』는 전5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저희가 읽을 책은 4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4권밖에 번역이 안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이 4권에는 세르의 사상적 역량이 잘 집약된 것으로 보입니다. 4권의 전체 제목이 <분포>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과학과 관련된 세르의 사상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의 머리말에서 세르는 우리의 전제를 깨기 위해 혼돈과 질서에 대한 선입견을 조목조목 따져 묻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서정연한 세계를 구현하려는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질서가 당연하고 질서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태초에는, 시초에는 무질서의 세계가 먼저였다고 세르는 얘기합니다. 무질서, 혼돈, 구름...구름은 멀리서 보면 윤곽이 잡혀 하나의 형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가까이 가면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기운으로 존재하죠. 우리는 이같이 구름 속을 헤매 듯 세계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더욱 질서와 법칙에 집착할 수밖에 없긴 합니다. 예측 불가능성은 어느 생명에게나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든 건 근대 이후 과학의 힘이 큽니다. 모든 걸 구획하고 조직화하여 보기 좋게 늘어놓는 과학의 힘은 분명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긴 했지만, 역으로 우리를 또 다른 시험대, 또 다른 시원의 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변화의 기운을 놓치고 ‘또 다른 질서’로 해결하려 합니다. 무질서가 문제이고 질서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서는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처럼 극히 일부분이며, 예외적이고 어쩌면 있음직 하지 않는 기적에 가까운 현상일 뿐입니다. “가장 있음직한 것은 무질서입니다. 현실은 합리적이지 않거나 극단적인 한계에서만 힙리적일 뿐입니다.”
근데 우리의 현실이 원래 합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비정상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 있는데 세르는 그것을 ‘권력’이라고 얘기합니다. 현실과 다르게 우리를 질서가 먼저이고 주이며 질서의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이상적인 믿음으로 이끌게 만드는 어떤 권력이 작동한다고 봅니다. 이 권력이 작동해야 과학도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겠죠. 오늘날 이 과학과 권력의 공모가 우리를 더욱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세르에게는 세계대전의 경험과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잔악함 목도한 경험이 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과학은 언제나 검과 가깝고 칼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은 이러한 과학적 질서를 원하고 과학적 지식은 이러한 권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권력에 대한 속성은 과학과 결을 같이 하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환상이 있죠. 권력 역시 과학적 지식의 도움으로 한 방향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출발은 창대하지만 그 이후 역시 출발과 비슷하거나 같을 뿐입니다. “과학은 이 지점에 대한 앎이며 권력은 이 지점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과학은 어떤 정적인 것의 주변을 에워싸는 법칙과는 상관없는 연쇄일 뿐입니다. 따라서 세르는 우화나 옛날 이야기가 이 세계에 대한 담론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혼돈이 대부분이고 질서가 드물다는 것을 알고 목격해야 합니다.
세르는 질서 이전 상태를 ‘배치’라는 용어를 가져와 설명합니다. 이 배치는 무작위의 카드 분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카드분배가 이루어질 뿐, 카드 분배자는 없습니다. 그 상태는 구름처럼 있다가도 없고 그냥 지나가면서 또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세르는 대부분의 철학자가 어떤 구조가 형성되는 조건, 에피스테메를 탐구하게 되는데, 이 ‘원래’라는 실체를 깨기 위해 또 다른 실체를 형성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배치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의 각진 관점을 계속 흩어놓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치라는 용어가 주는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배치를 하나의 있음의 상태로 규정하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덜 정리된 의미”일 뿐입니다. 세르가 얘기하는 배치라는 의미는 계속 읽어가면서 고민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르메스...고대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인, 이 은유체를 통해 세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앞으로 계속 책을 읽으며 고민해 봐야겠지만, 앞에서 얘기한 세르의 배치의 속성은 헤르메스의 속성과 결을 같이 합니다. 헤르메스는 메시지 전달신이지만 메시지를 배포하지도 분배하지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카드 분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헤르메스는, 배치는, 산재, 분포되어있는 혼돈의 상태입니다. 명확하게 명시할 수 없는, 있는 것도 없도 아닌 상태, 이 분산 속에는 온갖 정보들이 비밀처럼 산재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읽을 『헤르메스4권』에는 이러한 <분포>되어 있는 온갖 정보들을 읽는 방법론에 대해 세르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 거 같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세르에 의도에 걸맞게 ‘구름’처럼 사유하는 것이겠죠. 참 어렵습니다.
<오후시간>
이번 주 공부하게 된 완전한 열반의 큰 경(대반열반경)은 디가니까야를 가치 있게 만든 가장 위대한 경입니다. 다른 경전보다도 디가니까야에는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 생애를 아주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팀원들 각자의 포커스에 따라 후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아난다...무엇이 부족해서 깨달음이 늦었던 걸까.(혜윤)
저는 20년을 넘게 생사고락을 같이한 아난다를 왜 부처님은 본인이 살아 생전 깨닫도록 도와주지 못했냐는 겁니다. 저는 아난다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처한 환경의 문제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깨닫기 좋을 거 같은 환경이 어찌 보면 극한 환경인 거죠. 아난다 입장에서는 고매한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 힘을 쓰지 않게 되는 거죠. 아님 부처님 보좌하느라 자기 깨달음은 뒷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난다가 남들보다 모자르다기 보다 이처럼 본인에게 집중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적당히 현실에 만족해하며 사는 제 모습을 합리화 하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아난다가 간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생을 연장하지 않고 반열반에 듭니다. 아난다 뒤늦게 청원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거죠. 그리고 부처님은 이 모든 건 ‘네 탓’이라고 한마디로 갈무리합니다. 전 이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스스로의 절실함이 없는 이를 어찌 뒷목 잡고 끌고 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깨닫기 좋은 환경이란 게 있을 수 있나요. 그저 저의 무명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이 모든 건 네 잘못이다는 말에 꽂혀 어떻게든 변명의 여지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화살은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어찌보면 네가 원인이야 라는 지적이 아니라, 해결점이 너에게 있음을 에둘러 얘기하지 않고 콕 집어 명시하기 위해 충격요법을 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공덕은 공덕, 수행은 발심(미영)
아난다는 25년간 시자로서 부처님의 수발을 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덕을 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깨닫기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물론 우리 범부의 일반적 시각입니다. 근데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공덕을 그런대로 충분히 쌓았으니, 이제는 정진에 몰두하라고 말씀하십니다.근데 이 대목이 황당한거죠. 그럼 이제까지 시자생활은, 승가생활은,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되새기며 부처님을 닮고자 했던 수많은 노력은 정진이 아니란 말인가요. 나름 정진하고 정진했건만, 그 정진이 공덕으로 쌓여 당연 깨달음으로 이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생각하는 그 ‘열심히’가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심히 정진함에, 최선을 다했다고 이젠 그 성과를 기대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그 열심을 우리는 너무 쉽게 정진과 혼동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아난다가 뭘 놓치고 있는지 아시는 거죠. 진짜 너의 문제와 대면하는 그 정진의 시간이 아난다에게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공덕은 공덕이고 정진은 정진이다...이 둘을 분리하는 듯한 부처님의 논리에 불편함을 느끼신 미영샘의 글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여래의 마지막 유훈(윤순)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부처님 열반 직전 최후의 말씀입니다. 근데 뭘 정진하라는 걸까요? 바로 올바른 깨달음을 향해서. 근데 이 올바른 깨달음을 위한 정진...윤순샘은 왠지 모든 형성된 것은 부서지고야 만다는 무상의 논리에 대치된다는 생각에서 글을 전개해 오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지고 마는데 왜 불방일이 필요할까. 그렇게 되면 정진하면서 올바른 깨달음에 대해 실체화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모든 형성된 것에 올바른 깨달음이 역시 포함되므로 그 형성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마당에 무엇을 위해 우리에게 계속 정진하라고 얘기하는지 모순이 느껴지는 겁니다. 사실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말 그 자체에 우리는 끄달리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럼 그 고원한 경지가 있다라고 생각되는 순간 도달해야 한다라고 상정하게 되면서 정진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결국 그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실체의 있음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옥죄게 됩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무상을 외쳐도 우리의 의식의 습관, 언어의 습관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깨달음도 정진도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부단한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게 참 말인지 뭔지, 말장난의 연속인 거 같은데, 쓰면서도 참 아리까리 합니다. 여튼 우리의 한계이면서 우리가 넘어야 할 궁극의 목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의 발명이라는 매번의 과제(민호)
붓다의 완전한 열반은 제자들과 재가신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물론 모두들 슬픈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라한들은 그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으며, 보통의 수행자들은 온 몸을 뒹굴 정도로 참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물론 부처님에게 원한이 있었던 쑤밧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구요. 이 경에서는 근기고하를 막론하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처럼 불교의 관점은 감정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완전한 열반은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상의 진리를 몸소 현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법과, 자신을, 동료를,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아난다에게 당부하는 장면이 연결되어 의문이 듭니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유명한 구절말입니다. 세르가 얘기하는 섬의 개념과 연결되면서, 모든 건 무상한 가운데에서 믿고 의지할 건 나와 법이라는 것, 그러면 나와 법은 고정된 실체로 굳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근데 불교에서 말하는 ‘섬’이라는 개념은 보통 강가에 있는 ‘있다가도 사라질 수 있는 잠깐의 쉼’의 공간이라고 합니다. 단단한 토대가 아닌 거죠. 나라는 것도 변화하고 소멸하는데 나를 의지처로 삼으라는 건, 내가 봐야 하는 건 나, 내 안의 번뇌의 생성소멸을 봐야 한다는 거죠. 수행도구로써 삼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의미인 거 같기도 합니다. 아난다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궁금해하며 밖으로만 눈이 쏠려 나 자신을 보지 못하면 깨달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빈자리를 우리는 법과 자신 동료를 의지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는 죽었지만 우리는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합니다.
아난다는 우리의 여러 가지 버전 중 하나(은이샘)
대반열반경의 아난다는 다문제일, 제일 많이 듣고 제일 잘 암기하고 부처님의 입을 통해 온갖 좋은 말은 직접 들었던,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충분한 보상을 받아 마땅한, 그러나 부처님 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난다에게 쉽게 감정이입되는 거 같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아난다에게 수많은 명백한 암시와 징조로 눈치를 줬건만 아난다는 그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죠. 뒤늦은 그의 청원은 그의 무상함에 대한 무지를 드러냅니다. 그의 무명은 이후에도 여러차례 드러납니다. 아난다의 머리에는 온갖 정보만 가득할 뿐 지혜는 부족했던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있다’라고 하는 언어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이는 나를 내세우고 나와 세계를 분별하게끔 만듭니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더 예리하게 언어를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 아난다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난다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좋은 ‘법’의 도구로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번 주는 라니샘이 몸이 안 좋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부족하지만 후기로 그날의 분위기를 느껴주시고 담 주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후기에 담지 못한 좋은 내용들이 많았는데 옮기지 못해 아쉽네요. 다문제일 암기왕 아난다가 제 입장에서는 여는 깨달은 자 못지않게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약속한 대로 이상 짧은 후기 마치겠습니다.
*다음주 분량은 『디가니까야』 18,19,20장, 『헤르메스』 <구름> 편입니다.
세르의 서문을 한문장 한문장 뜯어보는 시간은 정말이지 흥미롭고도 유용했습니다.
합리성의 기원에는 권력이 있다는 말, 에피스테메조차 혼돈을 사유하는 도구는 될 수 없다는 말, 헤르메스는 메시지를 결코 지니고 있지 않고 단지 분배 자체일 뿐이라는 말... 구절구절들이 진중한 고민거리로 다가왔습니다. <대반열반경> 역시도 무척 감명깊었습니다. 아난다의 자리, 자등명 법등명... 언제 이렇게 정리를 해주셨다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짧은 <헤르메스> 서문을 빨리 토론하고, 남는 시간에 이번 주 중요하고 분량이 많은 <디가니까야>의 비중을 높이고자 했지만, 세르가 우리를 그렇게 두지 않았네요. 세르가 자신의 개념인 '구름'에 우리가 올라타도록 장치한 수려한 서문이었습니다. <디가니까야>의 '완전한 열반의 큰 경'은 스펙타클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우리의 지성을 자극한 풍요로운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쉴 시간을 잊었겠지요. 빠르고 풍성한 후기 덕분에 수업이 스르륵 복기되네요. 감사히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