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페미니즘과 기술>을 다 읽었습니다!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느낌표를 찍게 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담론이라도,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몸을 가지고서 어떤 굴곡을 살아가고 있는가(살아 왔는가)를 느끼게 만든다면 ‘힘 있는’ 것 같습니다. 차이가 어떻게 차별이 되고 있는가를 직시하게 하는 것이죠. 주디 와이즈먼의 글은 신중하면서도 격렬합니다. 역사와 차이를 제시하면서 본질주의를 빠져나가면서도 젠더 권력의 반영 양상들을 꼬집어 냅니다. 우리는 인간과 기술을 사유하기 위해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그 시도에서 기술은 인간사회복합체라는 것을 배웠고, 그 복합체를 빚어내는 권력 망에서 젠더를 빼놓을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니, 기술에 대한 사유는(계급, 문화, 인종만이 아니라) 반드시 페미니즘의 분석을 동반해야 하고, 반대로 가부장제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기술의 편향성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석은 언제나 불충분했지요.
5장에서는 기술의 가장 거시적인 화현인 건축설계 및 도시설계에서 드러나는 젠더 권력을 알아보았습니다. 근대화에 따른 주택 구조의 변화, 자동차 및 도로가 만드는 도시 환경, 편모 제인의 일상에 대한 묘사 등은 제게 또 다시 알지 못했던 세계를 일깨워 주었는데요. 함께 공부하는 중년 선생님들은 세월 속에서 권력인 줄 모르는 채 지나온 세월을 다시 사유할 기회가 되었다고 해주셨습니다. 6장에서 정리해주는 ‘기술-남성성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체의 강인함에서 기술친화성이 나온다’라는 전통적인 기술관은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사라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기술이 나오고 있는 중에도 기술과 남성성의 유착관계는 더 심해져만 가는데요. 이 현상에 대한 와이즈먼의 질문과 분석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이를 스마트기기들이 범람하는 2020년대에 끌어와서 사유해보면 흥미롭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채운샘은 정리 강의에서 여러 질문들을 던져주셨는데요. 어떤 기술이 어떻게 젠더 권력을 만들까라는 질문보다도, 젠더(혹은 장애, 연령, 계급)적 갈등과 소란이 불거지는 곳에서 기술이 어떻게 그것을 심화/완화하고 있는지를 사유하는 것이 더 적절한 기술철학적 접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해방보다는 예속을 낳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와이즈먼은 핀버그와 마찬가지로 결코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기술은 헤게모니적이기지만 언제나 예측불가능한 우발성을 동반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기술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기술을 작동/오작동시키는지,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되물을수록 예기치 못한 틈새가 생길 것입니다. 기술이든 젠더든, 어떤 일반화도 지양할 것. 와이즈먼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특정 종류의 기술의 지식과 실천을 구조화하는 특정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그럴 때 다른 길도 보일 것입니다.
이제 저희의 마지막 책,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만을 남기고 있는데요. 10주간 달려온 저희는 한 주 방학을 갖기로 했습니다(내적 환호). 그리고 강렬하게 만났던 <페미니즘과 기술>을 포함해 그 간의 기술철학을 공부하며 느낀 진중한 소감을 모아보기로 했습니다.
갑진년 3월 2일에 시작된 생기세미나는 “인간과 기술사이: 기술을 사유하기”라는 주제로 5권의 텍스트가 주어졌다.
첫 시작은 이광석 외 여러 명의 저자들이 해석한 개론서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이었다. 이 텍스트를 시작으로 4권의 책을 끝냈다. 책을 읽기 전까지 기술에 대해 내가 가진 개념은 ‘기술은 기계를 발명하고 기계는 우리 생활의 편리를 돕는 도구이다’가 전부였다.
그런데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시몽동이 제시한 기계와 인간의 ‘앙상블’의 개념과 스티글레르가 제시한 ‘앎-살 줄-앎’, ‘할 줄-앎’, ‘생각할 줄 -앎’의 개념을 배웠다. 이 개념들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사유와 배움 그리고 행동의 방향을 제안했다. 기술은 분명 도구 이상의 의미로 이미 내가 사는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고 나는 그것을 누리고 있다. 누리고 있음과 사유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는 것은 곧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4강의 텍스트였던 주디 와츠먼의 <페미니즘과 기술>을 통해 내가 살아온 세상이 왜 불편했는지, 또 누구의 어떤 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구성했는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데서 얻게 된 희열이 있었다. “기술변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불확정적이다. 기술설계자와 기술촉진자는 궁극적으로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지 예측하지 못하며 의도하지 않는 결과들이 나타난다.” 군수산업에 사용 목적을 두고 개발되었던 많은 기술들이 가전기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김남순 선생님
인간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인간을 바꾼다.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자연 속 물의 순환처럼, 기술과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존재들임을 이번 세미나를 통해 배웠다. 우리는 시대를 관통하는 상식을 당연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에 대한 편리함이 그렇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또한 그렇다. 당연함은 무관심이 되고, 무관심의 대상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은 개인이 컨트롤하기 힘든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는 인간을 바꾼다.
기술과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동일하다. 무지가 만들어낸 두려움을 이겨내고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힘이다. 격한 물리적 투쟁도 자기중심적 의견주장도 아닌 사회에 파문을 불러일으킬 작은 의문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관심을 놓아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한다. 기술과 사회의 디스토피아는 개인의 불통에서 올 것이다.
-김동현 선생님
지금까지 세미나를 통해 사회 속에서의 기술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기술과 젠더의 문제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기술이 우리의 삶•사회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진 만큼 여러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봄 선생님
우리 삶 속에 있는 기술을 사유하고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를 보게 됐다. 책을 한 권씩 읽어가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또 구체적으로 몰랐던 역사, 문화, 사회 영역별 기술과의 관계를 배울 수 있었다. 그것들을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각 분야 별로 아주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기술에 이용당하게 된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꼭두각시처럼 살면서(나로 살지 못하고),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힘, 자본, 정보를 가진 거대한 헤게모니가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지 모르고 있다. 이제 알아야 하고(이 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여정일까? 알기 위해 공부하고 생각하는 이 시간도 내게는 꽤 걸리겠다 ㅠ.ㅜ) 실천해야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나와 주변의 삶이 조금씩 바뀌겠다. 실천을 만들어 낼 앎으로서, 나부터 또 친구들과 함께 할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방향으로 변해야겠다. 우리를 위한 방향성 또한 많은 성찰과 합의가 필요하겠다.
-박지숙 선생님
그동안의 기술에 관한 사회학의 논쟁들은 주로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선한 영향 혹은 악한 영향을 평가하고 악한 영향은 최소화하고 선한 영향력을 늘여가야한다는 어중간한 입장에 서는 것을 기술에 ‘대한’ 중도적 입장인 척했다. 이런 기술에 ‘대한’ 관점은 기술과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를 실체화함으로써 사실상 아무 것도 건드리지 못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기술에 대한 이런 상식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생기 세미나에서, 특히 <페미니즘과 기술>이 나에게 가져다 준 전환은 기술 결정론, 즉 ‘사회에 대한 기술의 영향’을 절대화하는 관점을 돌아보게 했다. 그 관점을 구부리면 ‘기술에 대한 사회의 영향’을 파고들어 가게 되는데, 이는 그간 기술을 상대하는 주체를 유령화(즉 누가 그 기술을 쓰는가를 묻지 않는)했던 뭉툭하고 나이브했던 접근을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한다.
견고한 나의 상식을 깨는데 도움을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개념, '기술결정론'. 다시 정리하자. 먼저, ‘하나의 기술’과 그것을 쓰는 ‘인간’은 분리되어 있다는 기술과 인간의 분리. 둘째, 기술은 물질, 객관적인 것, 그것을 쓰는 인간은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는 안과 밖, 물질과 정신의 분리. 기술결정론이란 이런 분리의 태도를 말한다고 나는 이해했다.
와이즈먼은 “기술 지식은 암묵적이고 직관적인 지식 그리고 ‘실제로 해봄으로써만 알게 되는’, 지식의 그 같은 특징을 포함하고 있”(16p)음을 거듭 천명한다. 이는 앞서 스티글레르가 지식을 “할 줄- 앎”과 “살 줄-앎”으로 정리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페미니즘과 기술”에서 페미니즘과 기술은 어디서 어떤 교차점에 놓이는가 어리둥절했던 것에 약간의 단초가 놓이는 것 같다. 여성이 기술을 경험하는 방식은 남성이 기술을 경험하는 방식과 다르다. 이는 여성 중에도 젊은 여성이 기술을 경험하는 방식과 늙은 여성이, 도시 여성과 시골 여성이 기술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그 기술이 이미 성별화되어 있다는 것, 그 기술이 배치되는 방식 자체가 가부장적이라는 논의는 내게 사유의 뭉게구름을 만들어주었다.
-최난희 선생님
다음 시간(5.18) 공지입니다.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1부 1장(~73쪽)까지 읽고 가장 흥미로운 구절을 중심으로 과제를 적어옵니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규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