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본격적으로 ‘비행’에 관한 푸코의 분석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감옥에 대한 대안은 언제나 감옥이었다! 감옥의 실패는 바로 그것의 성공이기도 했다! 푸코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구금 중심의 행형체계는 그 성립과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합니다. 비판의 핵심은 ‘교정’이라는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사실 범법자를 갱생시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마음을 내서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습관에 굴복하여 똑같은 문제에 발목이 붙잡히곤 하는데, 원치도 않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아무리 교육과 교정을 해봐야 건실한 사회인이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은 그것이 교정의 대상으로 지목했던 비행자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일단 사소한 위법행위를 저질러 감옥에 수감된 범법자는 그 안에서 다른 범죄자들과 만나서 온갖 범행 수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복역을 마친 뒤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낙인과 범죄 기록,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는 그로 하여금 사회에 복귀하기 어렵게 만들죠. 그렇게 단순한 위법행위자였던 한 개인은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서 제대로 훈련된 비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만약 그가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던 가장이기라도 했다면 어떨까요?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다른 구성원들은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범죄에 대한 유혹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은 현실적으로 비행자를 생산해내는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푸코의 쇼킹한 주장은, 비행자의 생산이야말로 감옥의 아주 실제적인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비행자를 만들어내면 뭐가 좋을까요? 핵심은 관리입니다. 감옥은 비행자를 유형화하고, 그룹화하고, 재생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위법행위들을 관리가능하게 만듭니다. 관리가 불가능해지는 건 어떤 상황일까요? 가령 이런 겁니다. 위법행위자가 민중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할 때, 그리하여 위법행위가 정치화되어 권력의 구조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전환될 때 거기에 진정한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구금 중심의 형벌은 비행자들의 ‘별종의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민중들과 비행자들을 분리시키고, 비행자들을 덜 위험한 위법행위 쪽으로 인도합니다. 위험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위법행위자들은 이제 지속적인 추적과 관리와 감시 하에 놓이게 됩니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비행자 집단은 지배 계급의 불법적 이익추구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비행자들은 권력을 위한 정치적 관측소의 역할을 합니다. 경찰-감옥-비행자가 유기적으로 관계 맺으며 권력 효과를 산출해내는 것이지요.
저는 푸코의 관점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푸코는 감옥의 본래적 기능이나 거기에 부여된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그 실제적 작동을 ‘있는 그대로’ 분석합니다. 그것은 어떤 효과를 산출해내고 있는가, 그것이 지금 생산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방식이 제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감시와 처벌》을 끝까지 읽어 오시구요, 최소 3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해오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이야기한 것을 바탕으로 주제를 발전시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에세이 발표날이 되도록 해보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