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 아~주 큰 세계지도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지나가다 한 번씩 보고, 가끔 멈춰서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주의 깊게 보게 되는 그런 기물인데요. 왜, 갑자기! 세계지도가 붙게 됐을까요?
지도를 그려서 길을 찾아요!
바로 2월 10일 목요일에 개강하는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의 중요한 참고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세계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당장 남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 중 5개를 꼽는 사람은 드뭅니다. 러시아가 어디까지 걸쳐 있는지, 프랑스 주위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도 몰라요. 실제로 한국(혹은 한반도)을 모양이나 그 크기를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세계는커녕 자신이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거죠.
(좀 처참하죠...? ^^;;)
‘마이너(minor) 세계사’는 바로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연결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세미나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륙별로 그리지도 못해요. 아주 엉망이에요. 아마 앞으로 점점 더 ‘구글맵’이나 ‘네이버 지도’ 같은 편리한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욱 그럴 겁니다. 저희는 세계 어디에 가도 길을 찾을 수 있지만, 대신 그런 안도감과 맞바꿔 현지의 독특함을 지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신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지도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이지 않음이 드러나는 단편적 증거가 아닐까요?
지도 그리기란 역사적 감각을 익히는 훈련입니다!
지도 그리기는 매우 구체적으로 역사를 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를 대할 때 지나치게 ‘시간’에만 주의를 쏟아왔습니다. 그 결과, 공간적 특징부터 주변과의 알력 같은 것들이 모두 소거되었죠. 그런데 '공간'을 집어넣는 순간 완전히 다른 역사가 펼쳐집니다.
역사(歷史), 인류가 걸어온 흔적은 과연 시간에만 국한될까요? 개인의 신념과 확산부터 문물의 형성과 변화,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공간과 무관하게 일어날까요? 그 사건이 하필 다른 곳도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야만 했던 데에는 그곳의 지형적 특징, 그곳의 독특한 관계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즉, 공간이 없는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쪽짜리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많은 지도를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리면서 지도를 그리는 능력을 기르고자 합니다! 그건 곧 지도앱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누군가의 설명에 기대지 않고도 내가 놓인 관계망을 스스로 그리고 상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대 이후 세계를 설명해왔던 주요한 서사(Major)는 ‘서구를 중심으로 설명했던 진보·발전의 역사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구의 삶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흔적(歷史)은 진보·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마이너 세계사는 그동안 세계를 설명해왔던 주류적 서사인 진보·발전의 역사관으로부터 떠나 각자의 고유한 서사 속에서 새롭게 세계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요컨대 저희의 목표란 이렇습니다.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지도를 그리자!”
지도 그리기가 공부입니다!
지도를 새로 쓰기에 앞서 우선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알아야겠죠? 일단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저 사진에서도 나왔다시피 세계는커녕 한반도도 못 그리는 게 현주소입니다. 흠흠;; 저 큰 세계지도를 수시로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리면서 내 몸에 ‘세계’를 새겨 넣는 게 그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 다음 작업으로 양쪽 끝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놓은 기존의 지도가 아닌 각자의 관점이 돋보이는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리자는 거죠.
그런데 저처럼 공간에 대한 지각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지도를 보고 그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누구든’ 지도를 잘 그릴 수 있는 방식입니다!
먼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다이소나 문구점에서 코팅된 종이와 투명한 파일, 보드마카, 참고할 도판을 준비해주세요. 저는 한반도를 준비했습니다.
보드마카로 도판을 따라 그려 주세요. 코팅된 용지는 휴지나 물티슈, 칠판 지우개로 얼마든지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그럴듯한 뭔가가 그려지죠? 이걸 그리다 보면 정말 잘 그리게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희의 최종 목표는 도판을 대지 않고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고 그리지 않아도 잘 그리는지 점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왼쪽처럼 따로 코팅된 종이 위에 지도를 그려보고, 그 다음에 오른쪽처럼 참고했던 도판 위에 겹쳐서 비교를 해봅니다. 그러면 어디를 특히 못 그렸는지, 어떤 지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한지 알 수 있겠죠? 다만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섣불리 비교를 하다가는 기껏 올라간 자신감이 다시 내려갈 수도 있어요. 저처럼요.
어쨌든 생각 이상으로 재밌습니다. 게다가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 어디에서든, 이동 중에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참고할 도판만 있다면 그리고 싶은 지도는 모두 따라 그릴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지도를 그리다 보면 자연스레 손에서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되겠죠?
그리고 지금은 간신히 바다와 육지의 경계만을 따라 그리고 있지만, 여기에 산맥도 넣고, 독특한 지형도 넣고, 이런저런 것들을 넣다 보면 정말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지도가 탄생하겠죠? 크~ 상상력이 자극되지 않나요?
이외에도 전체 세계가 나오는 그림, 대륙별 그림들을 모아놨습니다. 심심하면 뒤적일 수 있는 텍스트도 많아요. 차근차근 그릴 수 있도록 커리큘럼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마이너 세계사를 신청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
개강 임박! 2월 10일 목요일에 시작합니다. 색다른 방식으로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 새로운 역사관을 정립하고 싶으신 분들,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놓고 싶으신 분들 등등 모두 다 환영합니다. 저와 함께 세계를 그려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