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에서 처음 기획된 청년 프로그램 ‘청년 지성 밴드’가 개강을 앞두고 있습니다(박수!). 그런데 청지밴드를 이끌어가는 매니저와 튜터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청지밴드에서의 공부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다들 궁금해 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혜원, 규창, 건화, 민호. 튜터 네 명이 모여서 청지밴드에 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 각자 간략히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혜원 : 저는 구혜원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동양고전과 생태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청지밴드에서는 2학기와 4학기 튜터를 맡았습니다.
민호 : 저는 성민호입니다. 과학과 생태학에 관심이 많아서 올해에도 그런 공부를 할 예정이에요. 청지에서는 2, 3학기 튜터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건화 : 청지 전체 매니저와 1, 4학기 튜터를 맡은 정건화입니다. 올해는 푸코를 주로 공부할 예정이에요.
규창 : 박규창이라 하고요, 규문에서 동양철학을 주로 공부했습니다. 청지밴드 전체 매니저이고 1, 2학기 튜터를 맡았습니다.
2. 어떤 생각으로 ‘청년지성밴드’를 기획하게 됐나요?
민호 : 특별히 ‘청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것은요, 모든 담론들이 너무 기성세대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미디어나 정치판만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는 연구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세대에 맞는 해석과 관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어요. 좋은 책을 읽고 훌륭한 강의를 들어도, 스스로 겪는 문제들을 자기 목소리로 담론화하지 못하면 결국 노예가 될 뿐이니까요!
규창 : 저는 비슷한 고민을 지닌 또래들과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기대했어요. 지금까지 함께 공부한 선생님들은 주로 부모세대세요. 그러니 아무리 수평적 관계에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들, 그분들은 자연스레 ‘(자식세대의 고민을) 들어준다’라고 하는 포지션을 취하시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당연한 일이죠. 가령 주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분들은 이미 집이 있거나 열심히 일 하면 내 집 마련이 꿈만은 아닌 시대를 살아오셨는데 지금 우리는 집을 사려면 ‘영끌’을 하거나 ‘빚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민호 :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에게는 기후 위기가 ‘여러 문제들 중 하나’일 수 없는데, 그에 관해 좀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함께 나눌 동세대의 동료들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고 연구실 바깥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자니,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 한들 같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한계가 뚜렷해요. 한 마디로 함께 공부를 하면서 담론을 공동 생산할 또래들이 규문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3. 청지밴드는 어떤 청년들에게 적합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나요?
건화 : 남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딱히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청년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제도나 전문가가 아니라 함께 실험을 할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해요. 혼자서는 폼도 안 나고 힘도 안 나니까요. 예를 들어 ‘아 일 하기 싫다’라고 혼자 푸념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 끼리 모여서 함께 공부하며 ‘노동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기술의 연마가 필요하고 어떤 관계망을 만들어내야 하며 어떤 윤리가 요청되는지를 함께 고민한다면 힘이 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문탁샘이 쓰신 책을 읽었는데, 자본이나 제도가 규정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문제를 개인의 고독하고 윤리적인 결단으로 만들지 말고 다 함께 하는 즐거운 일로 만들자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청지밴드가 그런 걸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혜원 :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사람이 와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다지 하고픈 일이 없어서 재밌는 일과 맛있는 것을 쫓으며 살다가 공부를 만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맛있는 음식이나 재밌는 영화 같은 외부적 대상이 주는 즐거움에는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 같아요. 제가 나름대로 맛있다는 것과 재밌다는 것을 다 찾아다녀 봤는데, 결국에는 질리게 되는 시점이 오더라구요. 반면 공부가 주는 즐거움은 잔잔한 듯하지만 끝이 없어요. 공부의 매력은 씹는 맛이에요. 계속 씹을 수 있거든요. 당장 분명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공부의 재미를 한 번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4. 청년지성밴드는 ‘지성’을 연마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연구실에서 공부한 경험을 토대로 각자 어떤 식으로 지성을 기르고 있는지 거칠게나마 얘기해주세요.
민호 : 저는 책 자체보다는 세미나에서 사람들과 토론하고 또 생활에서 동료들과 부대끼면서 더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남들 이야기를 주워듣고, 누가 하는 말에 한 마디 덧붙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반박하는 과정에서 공부라고 할 만한 것을 느꼈어요. 책은 그냥 읽어오는 것이죠. 읽고 쓰는 과제는 세미나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나, 어디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나, 이런 것들을 보고 겪으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규창 : 아무래도 연구실에서 ‘짬바’(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공부가 좀 됐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끼어들 수 있는 대화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뜻인 것 같아요. 예전에 저는 제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주로 또래들과만 대화를 나누었거든요. 예를 들면 정치 얘기, 선거 얘기가 나오면 꼰대들이나 하는 이야기라며 귀를 닫아 버렸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는 점점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제들 또한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기후위기라거나 공장식 축산의 문제라거나, 얼마 전에 유행하던 MZ세대의 공정담론이라거나... 이런 큰 문제들을 저의 삶과 연관하여, 저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공부하면서 문해력이 크게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여기저기 개입하고 참견할 수 있는 힘은 커진 것 같아요.
건화 : 우리를 현혹하는 ‘소문들’에 대한 면역력이 지성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 많은 경우 ‘여기에 투자를 해야 한다’, ‘이것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가봐야 한다’, ‘이 보험은 들어놔야 한다’ 하는 식의 정보들, 명령들에 쉽게 끌려 다니게 되잖아요.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는 상식이라는 외피를 쓴 소문들. 그런데 이건 우리의 경험이나 이해를 수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막연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남들을 따라가면서도 늘 불안하고 정처가 없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연구실 생활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저 자신이 놓인 삶의 조건에 대해서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소문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것도 지성일 수 있을까요?
민호 : 맞아요. 공부를 하면 소문과 카더라에 휘둘리는 연약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요.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이해하고 직접 경험한 것으로 삶의 중심을 세우는 것. 여기에 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건화 : 그런데 그런 힘을 기르려면 혼자 공부하는 걸로는 어렵고 함께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5. 규문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가장 달라진 점은?
규창 : 게임을 안 하게 됐어요. 연구실 생활을 하기 전에는 왠지 게임을 안 하면 하루의 마무리가 안 된 느낌이었어요. 즐겨야 할 걸 제대로 못 즐긴 느낌이라 강박적으로 게임을 했죠.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굳이 게임을 안 해도 심심하지가 않게 되었어요. 알바를 했을 때 돈을 어쨌든 벌어야 하니까 거기서 듣기 싫은 말과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견뎌내고서 그 시간을 남을 위해서 살았으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는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지겹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도 아니고 보상을 위해 억지로 하는 일도 아니다보니,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다가 집에 가도 강박적으로 보상을 찾지는 않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제가 이걸 느꼈던 게, 노동을 할 때는 돈을 못 받으면 그 과정이 부정되고 게임에서는 승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데 공부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예를 들어 에세이 발표 때 제 글에 대해서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당하고 저의 논리가 무너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데, 그때 느껴지는 묘한 쾌감이 있어요. 저는 생각할 수 있는 만큼 생각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런 피드백이 오더라도 글을 쓴 과정이 부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저의 시야가 확장되고 생각이 트이게 된다고 할까요? 오히려 좋아? (웃음)
혜원 : 저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가장 달라진 것 같아요. 저는 평소에 다른 사람이랑 감정적으로 엮이는 걸 불편해하는 편이라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이거든요. 그런데 연구실에서 맺는 관계에서는 도저히 그런 거리두기나 몸 사리기가 불가능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관계인 게, 사적으로 친해서 모인 것도 아니고 취향이 맞아서 모인 것도 아니고 또래 끼리 모인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명확히 나누고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관계도 아니죠. 직장에서는 옆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든 자기 일만 잘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연구실에서는 누가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연구실 안의 관계에서 다 드러나거든요. 아무튼 제일 친한 친구들과도 나누지 않는 것들을 연구실 사람들과 나누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싸우고, 울기도 하고, 서로에게 개입도 하고,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어요. 힘들긴 한데, 그래도 정체되는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혼자 있거나 다른 바깥의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저 자신을 알아가게 되기도 하고요(나는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줄 몰랐어!). 아무튼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외로울 새가 없습니다!
민호 : 저는 자기 비하가 줄어들었어요. 예전에는 의욕적이기는 했어도 감정이나 컨디션의 고저가 심했던 것 같아요. 들떠서 거창한 말을 떠들어대고 자기 자신에게 취하고, 그렇게 남들과 어울리고 나서 집에 오면 다운 될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면 자기 비하를 하게 되었고요. 연구실에 오고 나서는 그게 좀 줄어든 것 같아요. 전에는 슬픈 일이건 기쁜 일이건 내가 잘나거나 못나서 그런 거라고 해석했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고 나서는 주변 상황들, 조건들,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이 맞아 떨어져서 제가 지금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되었고요. 그러다보니 자의식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고, 슬픈 정념들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건화 : 권태가 사라졌어요. 여행과 연애에 대한 로망도 함께... 아, 물론 연애와 여행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삶이 ‘익사이팅’해지는 장소나 관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행지나, 나랑 딱 맞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는 삶이 시작될 거라는 기대. 일단 그게 다 일상을 밀도 있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내게 된 부적합한 관념이라는 걸 알게 됐고요. 자유에 대해서도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됐어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속한 공간이나 저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통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의 습관이나 외부의 힘들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저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요.
6. ‘청지 밴드’에서 가장 기대되는 프로그램이나 활동은 무엇인가요?
민호 : 등산이요. 친해지는 데는 함께 몸을 쓰는 게 최고잖아요. 매주 등산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혜원 : 3학기 금요일 프로그램인 철학연극이요. 연극은 평소에 자신이 쓰지 않던 다른 기운을 쓰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단은 매일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를 쓰는 방식을 배우면 어떤 식으로 분위기가 또 달라질지 궁금해요.
규창 : 저는 금요일 오후 시간이 제일 기대됩니다. 특히 1, 2학기 ‘지피지기 탐색시간’이요. 사주 이야기와 몸 알기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비슷하고도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청년들과 깊이 접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건화 : 2, 3학기 세미나 텍스트들이 가장 기대가 돼요. 경제와 생태에 관한 텍스트들인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없는 내용일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다른 청년들과 기후 위기와 같은 몸으로 와 닿는 주제에 관하여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담론을 생산해내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7. 각오와 포부
민호 : 우리는 이 비전으로 살겠다! 라는 그룹의 힘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규창 : 별 건 없고, 공부를 통해 또래 청년들과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건화 : 사람을 살피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두루두루 살피는 '두루치기 매니저'가 되겠습니다.
혜원 : 청지밴드를 스쳐 지나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푹 빠질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책만 읽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 찐하게 삶을 나누고 싶어요.
오~~ 고귀한(?) 청년들! 그 중에 가장 고귀한 비건 건화샘의 두루치기 포부라니! 청년 샘들의 솔직한 수다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나이가 넘쳐서 함께 하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항상 응원할게요!! 청지 밴드 파이팅!!!
"공부의 매력은 씹는 맛이에요. 계속 씹을 수 있거든요" -> 므흣한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는 곰앤나사이님의 표정이 그려지네요... 부디 꼭꼭 씹어 소화시키시길! 2030 규문 청년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오~~ 이 아름다운 청년들을 어이 지키고 키울수 있을지 근심 반 설렘 반이네요. 아무튼 오직 할 뿐인 그 길 위에 '넘치는 나이'인 기타 등등 들이 버티고 있겠습니다. 맘놓고 뛰어노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