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인년 첫 분기 주방장을 맡은 성민호입니다. 규창 님의 ‘경주 여행 이야기’ 마지막 대목에서 보셨겠지만, 규문 청년들은 ‘살림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연구실 살림과 활동을 가볍게 풀어가보려 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역시 음식과 사람이 드나드는 성소인 주방이 적절하겠지요?
렛 미 인트러듀스 아워 키친!
비교적 소규모 공동체인 규문은 매일 점심과 저녁을 지어서 나누어 먹습니다. 큰 공간은 아니지만(한 평 남짓한 알찬 공간!) 함께 공부하는 학인이라면 누구나 요리할 수 있고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지요. 비용은 따로 없습니다. 밥맛은, 꿀맛이지요.^^ 사실 대학생 시절, 한참 산만하고 멋모르던 제가 규문에 발을 들였던 것도, 거기 가면 그래도 밥은 얻어먹을 수 있었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밥을 잘 얻어먹은 덕분인지 어느새 주방 매니저가 되어 그 주방을 소개하고 있네요.
코로나 전, 그리고 규문각이 생기기 전에는 ‘규문홀’―지금의 원(元) 방―에서 수업을 했고, 점심시간이 되면 주방에서 밥을 떠서 함께 둘러앉아 나눠 먹었습니다. 세미나를 하다 보면 딸각딸각 밥 짓는 소리가 들려왔고, 반찬을 차릴 때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손을 놀리곤 했죠. 그러면서 얼핏 식사가 어떻게 요리되고 준비되고 또 정리되는지 모두가 가까이서 보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규모가 큰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줄었습니다. 여의치 않을 땐 배달 음식에 의존하기도 하면서, 주방과 규문홀은 썰렁해졌죠.
하지만 그럼에도 밥은 먹습니다. 규모는 줄었지만 연중무휴인 규문의 주방에 김이 나지 않는 날은 없지요. 루쉰의 말처럼, 밥 짓는 일은 날마다 강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되풀이됩니다. 다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메뉴, 재료, 요리하는 사람, 반찬, 국 먹는 사람이 늘 달라집니다. 식탁에서 이뤄지는, 차이 나는 반복이랄까요? 이번 살림 이야기에서는 규문 식구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한 번 쯤 궁금하셨던 주방의 이모저모를 공개해드리겠습니다. 기대되시나요? 이랏샤이마세 규문 키친!
규문의 모든 음식은 어디서 오는가?
규문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하면서, 이것을 알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 공동체 살림의 대부분은 선물로 돌아간다는 것! 공동체에서 자라긴 했지만 이미 교환관계를 뼛속까지 습득한 저로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이었죠. 매달 풍성하게 올라오는 선물목록 스크롤을 내리다보면 지금도 새삼 신기합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죠?^^
연구실에서 주로 먹고 있는 식재료를 볼까요. 우선 마음 담아 보내주신 선물로 늘 풍성한 것들이 있습니다. 곳간(배란다)에 쌓여 있는 쌀, 김치냉장고를 흘러넘치는 김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 계란, 밥도둑 김, 국물 및 반찬용 멸치, 구워 먹고 조려 먹는 생선까지! 캬, 사실 이것들로도 건강하고 맛난 식사가 다양하게 가능하지요. 그렇지만 또 더욱 풍성한 식탁을 위해 저희는 밑반찬과 밑간을 위한 재료를 준비합니다. 식용유, 간장, 버섯, 파, 마늘, 감자, 양파, 나물, 파스타면, 카레 등의 재료가 필요하죠. 그것들은 어디서 오냐구요? 주로 연구실 앞의 성대마트 혹은 혜화동 로터리의 홈플러스에서요ㅎㅎ. 산책을 가거나 식사를 준비할 때 장을 봐오곤 한답니다. 때론 장바구니 가득, 때론 딸랑 양파 몇 알만을 손에 들고 오기도 합니다.
하나하나 소중한 인프라 사인방
그렇다면 그렇게 들어온 음식은 어디 모셔지고 어떻게 요리될까요? 주방을 책임지는 첨단 인프라 사인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애틋하고 소중한 친구들이죠.
하이라이트 : 모든 음식은 이 위에서 요리됩니다. 인덕션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이름은 하이라이트 전기렌지더라구요. 주방 가장 안쪽, 공기가 잘 안 통할 정도로 제 몸집에 딱 맞는 곳에 들어가서 벌써 6년 째 열일하는 중입니다. 화구가 세 개인데, 세 곳을 한 번에 사용하면 금방 열받아서 에러가 뜹니다. 달래서 달래서 사용해야 하죠. 기다려주고, 닦아주고, 식혀주고. 이제 함께 사는 법에 익숙해진, 이 예민한 친구 덕분에 저희는 국과 반찬을 해 먹고 살고 있습니다.
냉장고 : 마찬가지로 6년째 열일하는 중입니다. 사실 열 잘 받는 하이라이트보다도 더 빡세게, 연중무휴로 일하죠. 그러다가 작년 여름 드디어 탈이 났습니다. 냉동실을 가득 채우는 옥수수와 생선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는 손길을 견디지 못하고 픽픽거리기 시작하더니, 냉동실에 얼려 놓은 마늘도 흐물흐물, 아이스크림도 흐물흐물해졌죠. 무더위에 너무 혹사시켰나 걱정하며 옆에 선풍기를 틀어놓기도 하고 나름 청소도 여러 번 했습니다. 두어 번의 A/S 결과 뒤쪽 팬에 낀 성에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기 검진이 이렇게 중요한 거였나요. 아직까지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름이 와 봐야 알겠지만요. 어쨌든 냉장고 덕분에 반찬과 식재료를 넣어두며 매일매일 잘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솥 : 왜 두 개냐구요? 오른쪽 것은 혜화동 규문 시절부터 함께해온 오래된 친군데요(거의 십년이 다 된...). 패킹이 문제가 있어서, 재작년에 새로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직 작동은 가능해서 나중에 손님이 많은 날 함께 사용하려고 모셔뒀었는데, 지난달부터 잡곡밥을 짓거나 푸슬리를 찌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새 밥솥은 물론 무척 강력하구요! (저 조밀조밀한 기능들이 보이시나요?) 두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다 함께 노나먹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김치냉장고 : 재작년 말, 넘치는 김치(건화, 규창, 혜원이 함께 살던 집의 냉장고까지 채웠던!)를 수용하기 위해 SOS를 청한 뒤 선물 받은 비교적 뉴비인 친구입니다. 벌써 2년째가 되어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빈자리가 나왔던 적이 없었죠. 겨울이면 선생님들께서 각지에서 보내주신 가지각색의 김장김치들이 차곡차곡 쌓여 차례로 천천히 익어가고 있답니다. 사실 김치냉장고가 오자마자 입주하여 아직까지 함께하고 있는 김치들도 좀 있죠. 김치통마다 ‘신김치’, ‘OLD’, ‘급함’, ‘새 것’ 등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습니다. 요번 겨울에 들어온 김치들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드디어 옛 김치들이 차례를 맞이하고 있네요. 사실 이번 주에서야 겨우 밖에서 냉장고 밖에서 대기하던 김치들이 자리를 분양받았네요. 그냥 먹고, 볶아 먹고, 지져 먹고, 끓여 먹으면서 김치의 힘을 섭취 중이니, 저희가 건강해짐과 동시에 김치냉장고도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요리!
재료와 인프라를 봤다면 이제 요리를 볼 시간이죠. 그런데 누가 밥을 하냐구요?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은 누가 요리를 하나요?’가 맞는 질문입니다. 규문에 요리 담당은 따로 없습니다. (그럼 매니저는 뭘 하느냐구요? 예, 허드렛일을 합니다.^^) 여유가 되고 세미나 시간과 겹치지 않으면, 혹은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손을 놀리고 싶으면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러 슬금슬금 주방으로 옵니다. 그리고 의외로 능숙한 솜씨로, 냉장고를 슥 스캔하고, 어제와 그제 무얼 먹었는지, 오늘은 몇 명이 먹는지 파악한 뒤, 우선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뚝딱뚝딱 재료를 손질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의 요리사인 것이죠! 물론, 해보지 않은 요리를 시도할 때는 ‘만개의 레시피’나 블로그를 참고하기도 합니다. 대강 참고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직감과 실험정신에 맞기죠. 그래도 제법 먹음직스럽고도 건강한 요리가 완성됩니다. 근 몇 년 이렇게 합을 맞추면서 모두가 요리역량이 일취월장했달까요. 물론 실수도 많이 합니다. 너무 짜다거나 밍밍하다거나, 그릇을 깬다거나... 그럴 땐 한 바탕 웃음바다가 되거나 굉장히 민망해지기도 하죠(사진으로는 규창이형이 전자렌지용 유리용기를 하이라이트에 올려서 깨져버린 용기와 '계란찜이었던 것'을 첨부합니다..) 이렇게 반찬 한 두 개를 하고 국을 끓이고 밑반찬을 내면 훌륭한 한 끼가 준비되고 곧 “식사들하십쇼~!”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와중에도 각자에게는 나름 범접하기 어려운 주특기들이 있습니다. 우선 건화형은, 한 때 계란말이 장인으로 불렸죠(저서에도 적혀 있죠). 하지만 비건 선언으로 요즘은 많이 소홀해지고, 그 대신 두부조림이나 파스타 등 청정한 요리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규창이형은 미역국과 김치찌개 등의 자극적인 국물류에 능합니다. 액젓을 조합하는 기술이 탁월해 첫 숟가락부터 먹는 사람을 휘어잡습니다. 훈샘은 된장찌개와 나물무침에 능합니다. 저처럼 아재 입맛인 사람에게는 훈샘 나물은 최고의 사냥감입니다. 저는 생선을 좋아해서 생선구이를 시도합니다. 날마다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잘 안 굽다 보니 독자적인 영역이 되었네요. 혜원 누나는 사실 저희 남정네들보다는 몇 레벨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쩔쩔매고 있으면 피식 웃음을 날리죠. 아재 음식들보다는 낯선 소스와 양념을 사용하는 파스타, 전, 볶음 요리 등 약간 서양 분위기 나는 고급 요리를 선호합니다. 주부9단 정옥샘은 만능이죠. 연구실에서까지 밥을 하느냐고 주방에서는 추방되었지만, 몰래 와서 간을 맞춰주시거나 위급상황 시 요리사들이 간언을 구하러 찾아가곤 합니다.
차리고 닦고 치우고
요리사들의 역량을 봤다면, 주방에서 요리가 어떻게 차려지고 정리되는지, 그 풍경을 스케치해볼게요. 먹는 인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때는 두 명, 추가적인 요리가 필요할 때는 세 명이나 그 이상이 힘을 합쳐 식사를 준비합니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북적이긴 하지요. 한 명이 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만들면, 다른 한 명은 재료 손질을 하거나 보조를 하면서 밑반찬들을 플레이팅하지요. 보통 식사시간 30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아침은 각자 간단히 먹고, 점심과 저녁을 차려서 함께 먹습니다. 사람이 많든 적든 항상 식사는 준비되오니, 기회가 되시면 함께 들어요! 규문 식탁은 언제든 열려있습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둘러앉아 나누는 담소가 마무리되면 함께 일어나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져다줍니다. 보통 식사준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맡고, 다른 사람들은 반찬 정리나 식탁 정리를 하고, 향을 피우고 환기를 합니다. 설거지는 기본 2인 1조이고, 양이 좀 있을 때는 보조자가 더해져 3인 1조를 이뤄서 진행됩니다. 맨 오른쪽 사람이 수세미로 세척해서 왼쪽으로 넘겨주면, 그 다음 사람이 헹구어서 왼쪽 식기 건조대에 놓지요. 양이 많으면 한 번에 엎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보조자가 그릇들을 빼서 행주로 물기를 닦아 찬장 원래 자리에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기본이지요.
자, 저희는 이렇게 차리고, 이렇게 나누고, 이렇게 정리하며 매일매일 먹고 살아갑니다. 어떤가요? 식사하러 오고 싶지 않으신가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럼 여기서 살림 이야기 첫 화를 마치겠습니다!
오! 규문의 주방이 명실상부 '주방다운' 느낌이 드는 건 저의 기분 탓일까요... 미노의 소통주방을 응원합니다~~
땡큐유 포 유어 카인드 인트러듀스 유어 키친~
언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니~ 그중에서 찌꺼기가 눌러붙은 하이라이트 화구들을 보니 짠해지네요...ㅋㅋㅋㅋㅋ 더 깨끗하게 써야지.
이 천방지축 어리둥절 주방이 생태주방으로 거듭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