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규문각 리뷰대회 대상작
듣기, 만나고 채우는 여정
문제현(리베카 솔닛『멀고도 가까운』)
텍사스 한마을에서 아이가 우물에 빠졌고, 차 안에서 그 소식을 듣던 찰리 머슬화이트는 술을 끊는다. 머나먼 존재의 사건이 어떻게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멀고도 가까운』에선 그 낯선 감수성을 이해할 단서가 놓여있다. 이것은 '듣기'라는 이름의 실마리였다. 듣기란 무엇일까. 리베카 솔닛은 그것을 미로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듣는다는 것은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다.(284쪽)"
상대에게 내 영역을 내어주고 나 또한 남을 위해 충분히 헤매는 것이 바로 듣기이다. 나를 사용함으로써 상대의 말이 나의 언어가 되고 내 일부가 된다. 듣는다는 행위, 그것은 내 생각보다 더 능동적인 일이었다.
듣기 위해서는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기할 줄 아는' 것이다. 솔닛은 스스로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두려움이 보인다고 했다. 두려움. 본인의 일부를 내어준다는 점에서 듣기란 마치 옅게 희석된 죽음과도 같아 보였다. 자기를 이야기하지 못하면 그 보잘것없는 개인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말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외치던 사람들, 그 뻣뻣해진 겉면이 한순간에 빈속을 보호하기 위한 돌무덤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라는 우물에 빠진 결과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듣기를 까먹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모습이었다. 그럼 머슬화이트는 어떠했는가? 그는 듣기를 믿었고, 자기 삶으로 불쑥 침범한 아이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라디오가 음절을 내뱉는 순간, 감정이입을 통해 스스로를 벗어났으며 자신을 바깥에서 보았다. 변화를 기대하고, 변화를 기도하던 그의 마음. 그것이 가장 구체적인 들음의 방식으로써 자기를 벗어날 사다리로 작용하고, 자신의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만듦으로써 치료가 되었다. 아이가 건져짐과 동시에 머슬화이트 또한 알코올 의존으로부터 구해진 것이다. 기대던 것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짐으로써 그는 자기를 더욱 곧게 세우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나 또한 그의 간증을 들으며, 내가 가장 비대하던 때를 떠올려본다. 비만으로 병역 4급을 판정받았던 그 당시를. 때는 이십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건강 이상의 징후가 보였지만, 그것은 내게 어떠한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리베카 솔닛은 신체의 경계를 '고통'으로 나누는데, 그에 따르면 신음하던 내 신체를 듣지 못했던 그 나날들은 내 몸이 제일 작았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작년부터는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참 작고도 꾸준했던 변화였다. 일년 동안 약 20kg 감량을 했는데 나는 이 의지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사유해 보기를, 나는 이제서야 ‘듣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한다. 규문에 처음 와서 전제가 다른 사람들과 글을 나누고, 수업을 듣는 경험. '수상한'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경험. 그 모든 낯섦들이 나를 듣는 체험이었다. 들으면 ‘내’가 사라질까 두려워 공부하지 못했던 나의 생각들이 이제는 낯설게도 느껴진다.
귀 기울이고, 벗어나 생각해 본다. 내게 이입하고 타인을 해석하는 과정들. 그것이 듣기였다. 주관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채우고 남과 만나는 일련의 여정이었다. 그것이 체중 감량이라는 형태로 삶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지 않을까. 가깝고도 멀었던 신체를 다시 만나는 경험. 이제는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몸이 상하는 게 무서워졌다. 참 당연한 걸 이제서야 한다.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158쪽)”
몸을 채우는 다이어트를 겪으며, 드디어 타자에게 허락할 미로가 생긴 게 아닐지. 여정 끝에서 이제는 남을 만난다. 변화가 어디서 오는지 알았으니 조금 더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멀고도 가까운』은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의 걸음으로 시작하여, 자신을 만나고 타자를 채우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들음. 듣기의 여정이다.
와우 제현샘의 글을 읽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듣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 '자기 이야기를 포기하는' 듣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네요.
"들으면 ‘내’가 사라질까 두려워 공부하지 못했다"는 고백도 와 닿습니다. 저도 이런 식으로 경직될 때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대상 당선작은 역시 다르군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
제현샘 체중감량 이상으로 사유가 깊어지고 공부가 늘고 있음이 느껴졌는데, 샘의 글을 읽으니 이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보이네요.^^
샘의 글에서 "듣기 위해서는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기할 줄 아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고, 공부를 같이 하는 학인으로서 잘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린 마주치는 타자를 잘 겪는 게 중요한데, 무엇보다도 타자가 얘기하는 걸 잘 듣고 이를 통해 견고한 나를 깨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조별 토론, 에세이 코멘트 등에서 타자를 허락하고 나를 좀 더 내어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대상 다시 한번 축하하고, 글 감사해요.👍👍👍
오~~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ᆢ제현샘의 독해 감명깊게 읽었어요. 살구가 도착하고 그것이 무르고 익어가고 잼으로 변신하는 동안 어머니의 정신도 나갔다돌아왔다 변해가죠. 신체성의 섞임, 그 순환과 반복의 이야기를 저도 아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읽기와 듣기에 대한 사유로 연결되네요.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기쁩니다~~대상 축하해요~~
제현쌤 대상작 잘 읽어보았습니다. 체중감량이지만 '몸을 채우는 다이어트'를 실천한 것; 삶에서 앎을 실험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근데 그걸 해냈군요!! 결국 대상까지~~~ "귀 기울이고, 벗어나 생각해 본다. 내게 이입하고 타인을 해석하는 과정들. 그것이 듣기였다. 주관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채우고 남과 만나는 일련의 여정이었다. " 요 구절을 저도 몸에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만들기도 글쓰기도 건강한 몸도 결국은 하나의 리듬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 같아 부럽기도 하면서 저도 따라해 볼라구요~~ 대상 축하축하!!
오 제현샘 글 너무 감동적이게 읽었어요! 정말 제현샘 글이 작년과 비교해서 매우 달라졌음을 느끼네요. 작년에는 생각보다 굉장히 차갑고 애써서 어떤 거리를 늘 확보하려는 / 혹은 지나치게 경계하는? ^^ 느낌을 받았었는데 차츰 차츰 글의 어조가 바뀌고 그 결실이 이런 따뜻하고 솔직하고 찐감동으로 드러나네요. 이러한 변화가 나를 내어주는 ‘듣기’의 연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란 추측도 해봅니다. 제현샘 글 읽고 이 책이 매우 궁금해졌어요. 채운샘께서 비평글은 작품을 아직 안 본 누군가가 그것을 향유하고 싶게 하는 거라고 하신 적 있는데, 제현샘 성공입니다 🙂
듣기와 다이어트는 비움이면서 채움이다! 샘의 글에서 다른 시각을 얻어갑니다 감사하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