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자! 어떻게?!
어렸을 때는 사서를 직업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바코드 좀 찍다가 북트럭을 밀고 몇 번 서가를 왔다갔다 하면서 책을 꽂는 직업이 한가하고 좋아 보였거든요. 이제는 이것이 전국 사서분들이 들으면 들고 일어날 망상이라는 걸 압니다. 도서관은 사실 책을 빌리고 열람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벤트 회사에 가까우며, 사서는 그 이벤트 기획자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책. 무거운, 그야말로 물성이 짱짱한 책입니다. 사서는 굳~이 규문각까지 와야 읽고, 빌리고, 구입할 수 있는 책으로 연구실을 오가는 선생님들과 만날 궁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들과 저 선생님들의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하여 이번 '살림 이야기'에서는 규문각 사서들이 어떻게 책읽기를 권하는지, 어떻게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지(!) 그 고민의 흔적을 살펴볼까 합니다. 다만 둘 다 사서는 처음이라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합니다.
1. 인프라 정비의 함정
도서관의 기본은 자료 대출이죠. 하여 자료 정리도 필요하고 분류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개관 전 온갖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옮기고 데이터를 작성하고 시스템을 정비했습니다. 북트럭도 하나 큼직한 것으로 샀습니다(우리 '짱'은 이렇게 큰 걸 뭐하러 샀냐고 했어요...ㅠㅠ). 이렇게 큰맘먹고 여러가지를 '지르고', 인프라를 갖췄으니 이제 책을 빌려가시면 됩니다! 하고 야심차게 규문각을 열었는데요.
문제는
아무도
책을 안 빌려가...
이런 심정
원인을 분석해보니 역시 경쟁상대(?)가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서 대출을 권해도, 세미나 책 읽기 바쁜데 언제 다른 책을 읽겠냐는 하소연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잘 알죠. 책을 빌려도, '다음날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열 번 정도 먹다 보면 어느새 반납일이 코앞이죠. 규문각이 꼭 책을 빌려야 하는 곳도 아니고요. 대출을 하지 않아도, 참고도서를 살짝 들여다보거나 복사할 수도 있고, 어떤 책이 있는지 구경할 수도 있고, 추천 도서 목록을 보고 자극 받아서 직접 책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개인 자격으로 이 정도 장서... 관장님의 출판시장 기여도를 생각하면, 규문각은 정말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하지만 역시 책을 좀 빌려가 주시면 안 될까...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4월에는 대출 장부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가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두꺼운 대출장부, 다양하고 많은(!) 필사지를 준비했어요...왜냐하면...😘
2. '필.꾸'의 매력
물론 '대출자 0'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규문각에서는 대출도서를 반납할 때 필사용지를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직접 손으로 쓴 필사지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저는 사실 규문각 재개장을 기획하면서 이 코너를 제일 기대했습니다. 사람 수만큼 다양한 필체로 필사 게시판을 채우고 싶다는 야심(?)을 갖고 있지요. 지금은 필사지가 딱 아홉 개 걸려 있습니다만...^^
필사는 감명깊은 구절을 굳이 손으로 옮겨 적는 것입니다. 때문에 필사를 할 때면 평소 글씨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쓰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취향에 따라 특별한 종이를 고르기도 하고, 펜도 평소와 다른 걸 쓰게 되지요. 개중에는 필사지에 좋은 구절만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한 '필.꾸(필사지 꾸미기)'를 하기도 합니다. 예쁜 스티커를 붙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마스킹 테이프로 테두리를 장식하는 등등 채식본을 만드는 중세 수도사처럼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는 겁니다. 그럼 책에서도 그 부분만큼은 특별하게 남지 않을까요? 필사를 거듭할수록 보물같은 구절들이 내 안에도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까요?
그런 노력이 십분 발휘된 필사지를 지금 규문각 한쪽 벽에 전시 중입니다. 차곡차곡 모아서 연말에 이상한 시상식도 하고, 역사적인 자료로 남기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게시판이 필사지로 뒤덮이면 좋겠다는 생각중
3. 클럽 조직!
사실 규문각에서는 필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낭송&필사 클럽'입니다. 규문 세미나 중에서는 드물게도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 모임! 하지만 부담스러운 세미나는 아닙니다. 딱! 30분만 만나거든요. 읽는 분량도 이 주에 한 권! 다만 시간이 좀 유니크 합니다. 월요일, 금요일 아침 7시거든요. '낭.필 클럽'에서는 광란의(?) 일요일 다음날, 기나긴 평일의 마지막날 아침, 한 주를 제대로 열고 닫자는 의미에서 온라인상에 모여 필사를 나누고 낭송합니다. 이른 아침,모두 내추럴한 모습으로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지요.
한 책을 가지고 필사한 구절을 낭송하는 모임이다보니 간혹 구절이 겹치기도 합니다. 필사를 할 구절을 고를 때는 자의적으로 자르지 않아도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 때문에 시선이 공통된 곳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중복된 구절이 많지요. 하지만 '낭.필 클럽'에서는 구절이 겹쳐도 모두 읽습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읽을 때와 남이 읽을 때 그 구절이 주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같은 부분이라도 호흡을 고르는 부분이나 생략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조금씩 다르게 문장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나는 무심히 지나쳤던 부분을 누군가는 일부러 필사까지 해서 낭송 할 정도로 감명 깊게 읽었다면, 그 부분이 다시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렇게 여러 명이 같은 책을 여러 번 낭송 하면, 분명 한 번 읽었는데도 재독, 삼독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앉아만 있는데 여러 번 책을 읽은 효과가 난다? 그야말로 '꿀'이죠.
'낭.필 클럽'은 매달 가입자를 받습니다. 현재 4월 회원모집의 문을 열어 놓았으니 아름다운 아침을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주저 마시고 들어오세요~!
'낭.필 클럽'에서는 보통 정해진 노트에 필사를 합니다만, 가끔 이렇게 '필.꾸'를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4. 'BOOK적BOOK적'
이벤트 회사는 무엇을 하는가? 매번 반복되는 일상을 비집고 들어가 활력을 심어줄 다양한 일을 기획을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즌의 온도, 습도, 강우량 등등을 체크해서 어떤 컨셉이 좋을지 고민하고, 사람들이 혹할 만한 상품도 마련하고, 적당한 시기를 봐서 돌발성 이벤트도 벌이고 등등 다양한 일을 하지요. 규문각에서도 'BOOK적BOOK적'이라는, 북큐레이션과 리뷰 대회 및 문장 선물과 암송대회와 인증샷 이벤트를 진행중에 있습니다(자세한 건 여길 봐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결국 격월로 추천도서를 선정해 그것을 어떻게든 여러분이 읽도록 여러 일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이벤트를 하는가...그냥 자료를 많이 두고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찾아가면 그것으로 도서관의 소임을 다 하는 게 아닌가? 솔직히 예전에 도서관 이용을 할 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역시 자료를 갖춰두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게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더군요.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의 가치를 계속 발견해서 어필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관리와 관심이 없으면 규문각은 그냥 책이 많은 세미나실로 남겠죠. 책들도 자리만 차지하는, 죽은 물건이 될 테고요. 그런 슬픈 일을 막기 위해 이런저런 이벤트를 마련했사오니 여러분 많은 관심 부탁 드리며, 특히 원하는 컨셉이나 이벤트 아이디어가 있다면 지체 없이 사서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가위를 들고
3월 10일 목요일, 역사적인 20대 대선 다음날 아침 저는 코팅이 가능한 출력소를 찾아가 코팅지에 한 땀 한 땀 자른 규타벅스 쿠폰 종잇조각을 정렬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작업은 간격이 핵심이지요. 사장님은 효율적으로 공간을 배정해 척척 놓으시는데 옆에서 하는 저는 정렬시킨다기보다는 늘어놓는다는 말이 더 어울렸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건드려도 후두둑 떨어지는, 규타벅스의 '마스터 정'의 얼굴이 박힌 쿠폰조각들...몇몇은 복사기 사이로 떨어져 영영 이별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업 내내 그날 새벽 당선이 확정된 예비대통령의 우렁찬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왔습니다(부디 무사히...뭐든 무사하면 좋겠습니다). 그다지 쾌적한 작업환경은 아니었지요. 코팅지를 들고 연구실로 와 쿠폰을 하나씩 잘랐습니다. 이렇게 '북적북적' 이벤트의 상품이 될 규타벅스 쿠폰을 만들었습니다. 내친김에 미리 인쇄해 둔 '북적북적'의 추천도서 구절이 적힌 종이도 잘랐지요. '규보문고' 할인도서 코너에 붙일 가격표도 잘랐고요. 규문각을 정비하면서 결국 마무리 하기 위해 들었던 연장도 가위였습니다. 싹뚝싹뚝.
가위로 자르고 붙이다 보면 저의 재주가 정말 메주라는 것과, 그런 손으로 온갖 물리적인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규문각은 정말 손에 잡히는 책들과, 그 책들이 차지하는 공간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죠. 그곳에서 책을 소개하고, 대출을 장려하고, 도서 구매를 촉구하고, 세미나도 홍보하고, 이벤트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면서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공간을 꾸미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해서(!)
어쩌다 포토샵을 배워 이것저것 만들게 된 지 n년...마우스와 키보드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어떻게든 뭔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사실 그건 다 망상이었다는 것을 실감중입니다. 포토샵은 뛰어봐야 모니터 만한 캔버스가 전부, 게다가 망치면 'crtl+Z'를 누르고 다시 하면 그만이죠. 일단 디자인 하면 홈페이지에 올리면 땡이고요. 하지만 물리적인 공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용을 들여 뭔가를 계속 사서 채워 놔야 하고, 관리도 해야 하죠. 이 당연한 사실을 요즘 알아가는 중입니다. 가위를 들고.
규문각 책을 보고 계시는 한 선생님께 집에 있는 책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한 자신을 반성합니다. 어떤 공간이 돌아간다는 것은 그 안에 무수한 노고가 있다는 걸 간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날로 먹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심에 낭필클럽이 꿀로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ㅋㅋㅋ 커피 쿠폰을 보며... 팀주역 샘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겠습니다. 북트럭이 쉴 틈없이 움직일 수 있는 날을 꿈꾸며(올 수 있겠죠?) 천천히 한 걸음씩 나가는데 큰 힘(?ㅋㅋ) 보태겠습니다.
본업이 글쓰는 분들 맞는거죠? 규문 연구원들 분신술을 쓰는건가요? 이젠 이벤트회사 직원까지! 와 돼단돼단! 규문각 이벤트직원분들 노고 덕에 저희들은 즐겁고 재밌긴 하네요. 책도... 대출해 볼게유😱😱
"정녕 제 긴 인생은 책으로 인해 향방이 정해졌음을,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낭송 필사 클럽 샘이 써 주신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의 글귀가 넘 좋네요. 간결한 글귀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또 어떤 샘의 필체일까요? 타이핑도, 펜도 신체를 경유한 것이지만, 고유한 필체는 생동감이 넘쳐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또 필사자가 끌린 지점에 읽는 이도 교감하게 되거든요. 마치 선물 같아요^^
저는 규문에 와서 책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여전히 머릿속이 산만하고 정리를 잘 못 하지만, 책이 어렵고 생소하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자체가 무진장 즐겁고 행복하다는 거! 책을 읽고 체험하는 방식, 신체 감각이 달라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리베카 솔닛 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을 배워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책을 빌려서 읽어야 할 텐데... 책 읽는 버릇이 밑줄 그으가며 지저분하게 만들면서 읽는 스타일이라 왠만하면 사서 보는데 ... 혜원 샘과 여러 샘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그리고 혜원샘의 맛깔난 글과 공명하려면 책을 빌려서도 읽어얄 거 같은 마음이 막 올라오네요^^
그리고 규타벅스 쿠폰을 저렇게 하나하나 오려서 또 코팅을 하고, 다시 모양에 따라 자르고... 그런 섬세한 일까지...
혜원샘의 어린 시절 잠시 꿈꾼 일이 규문에서 이루지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