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학기입니다~ 왜 이리 빠릅니까 시간! 아무튼 이번 학기에는 커리큘럼을 조금 변경해서 『증여론』(모스), 『돌봄선언』(더케어컬렉티브), 『젠더』(일리치), 『타자의 추방』(한병철) 이렇게 네 권의 책을 읽게 됩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증여론』 해제와 1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소문으로만 접하던, 그 유명한 『증여론』을 드디어 직접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모스는 태평양 제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북부 아시아, 아메리카 등의 부족 중심 사회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자료를 통하여 선물의 형태로 행해지는 교환과 계약의 실천들을 연구합니다.
모스는 꽤나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현재에 아주 근접한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원시(原始) 또는 저급(低級)이라는 명칭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사회에서도, 자연경제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한 것은 결코 전재하지 않은 듯하다.”(51쪽) ‘단순한 교환’ 같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 우리의 교환제도나 경제생활의 자연적 기원이나 유아기에 해당하는 기초적이고 조야한 교환의 흔적들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태고적 유형의 사회들에는 분명 경제적 거래가 존재했으나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저는 여기에서부터 모스의 입장이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는 ‘우리’의 경제, 제도, 자명함에 비추어 ‘그들’을 보고자 하지 않습니다. 모스에게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부족 중심의 사회, 서구화되지 않은 이질적 사회들은 ‘원시’ 사회가 아닙니다. 문명의 출발점에 머물러 있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교환 제도와 도덕, 가치, 삶의 양식을 지니고 있는 사회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 사회가 우리와 완전히 무관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스는 그가 연구한 사회들에서 나타나는 “도덕과 경제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또 말하자면 암암리에 기능하고 있다”(49쪽)고 말합니다. 아직 1장 밖에 읽지 않았지만, 모스에게 다양한 이질적 인간 집단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를 통하여 현재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됩니다.
저는, 그 유명한, 마오리족의 ‘하우’가 인상 깊었습니다. 하우란 물건에 깃들어 있는 아우라 같은 것입니다. 물건이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질 때 하우가 움직입니다. 그것은 이전 소유자의 일부가 새로운 소유자에게 전해지는 것이기도 하고, 물건이 속해 있는 장소의 기운이 옮겨오는 것이기도 하죠. 민호는 선운사 금동지장보살보좌상에 얽힌 이야기를 공통과제에 풀어주었는데요. 도난당한 불상을 소장하고 있던 일본인 수집가의 꿈에 지장보살이 나타나는가 하면 불상을 반환하지 않자 병이 생기고 집안이 기울어 결국 불상을 돌려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오리족 역시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물건에 깃든 하우에 의해 화를 입게 된다고 믿었답니다.
하우를 단순히 애니미즘적 미신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모스의 방법론을 따라서 우리는 하우라는 개념을 전체 사회의 작동방식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생활 및 교환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볼 때 하우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유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기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우란 하나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복잡한 관계성들과 맥락들을 표현하는 개념이 아닐까요? 지금 내가 점유하고 있는 이 물건이 자연 및 공동체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나에게 주어져 있음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우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제 우리는 어떤 물건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소유주가 아니라 하우의 부단한 흐름 속의 한 국면을 이루게 되겠지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소유권에 대한 관념. 이것이 곳곳에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적소유의 관념은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의 사고와 실천을 규정하는 토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 마음, 시간 같은 것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를 자유와 동일시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처럼 순수한 사적소유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오직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망 속에서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소유권마저도 사실은 사회적 합의와 이해의 결과이지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적인 소유를 자명한 것으로 믿게끔 하는 걸까요? 이것은 상당히 구멍이 많은 개념인 것 같은데 말이지요. 혜원누나는 과제에서 화폐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화폐는 물건으로부터 하우를 지워내는 데 아주 뚜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교환이란 관계와 맥락을 끊어내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화폐를 매개로 혹은 척도로 행해지는 교환에서는 아무런 잉여가 남지 않지요. 누가 후하게 베푼 일도 없고 누가 빚지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정확히 등가가 교환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물건들의 속성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음식인지 옷인지 책인지, 그것이 누구의 손을 거쳐서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건들이 환원 가능한 숫자로 표현될 때 물건들의 고유한 아우라는 소거됩니다.
화폐 자체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화폐도 일종의 물건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하우, 아우라 혹은 어떤 영적인 것이 깃들 여지가 없나? 이런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해보았지요.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에 금속 화폐는 금이나 은 같은 금속이 지니는 우월함과 고귀함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화폐의 재현하는 능력이 아니라 금속의 고유한 가치가 우선시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화폐는 점차 효율적인 교환의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화폐가 완전히 물질성을 떠난 상황입니다. 가상화폐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사물에 깃든 영적인 힘, 그 관계성과 맥락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증여사회의 감수성을 갑자기 이식받을 수는 없습니다. 증여사회가 아름다운 이상향인 것도 아니고요.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경제생활과 가치판단을 지배하는 어떠어떠한 관념들이 반드시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증여사회에 대한 모스의 연구를 통해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현실을 보는 눈이 조금은 확장되거나 변형될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증여론 2장을 읽고 세미나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