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문명에서도 이익을 추구하지만 현대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 재산을 모으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출하기 위해서,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충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환을 하지만, 그 대상물은 특히 사치품, 장식품, 의복이거나 즉시 교환되는 물건, 향연이다. 받은 것 이상으로 갚지만, 그것은 처음의 증여자나 교환자를 압도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지연된 소비’로 인해 그가 입은 손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익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이익은 우리를 이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것에 불과하다.”(마르셀 모스, <증여론>, 269~270쪽)
<증여론>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 읽은 <증여론> 부분에서 모스는 말리노프스키를 인용해 트로브리안드 제도 섬들의 포틀래치를 본격적으로 논합니다. 트로브리안드 제도는 몇백 킬로미터에 걸쳐있습니다. 지도만 보면 모두 개별적인 부족들로 보이죠. 하지만 이 몇백 킬로미터를 하나로 엮어주는 '소용돌이' 같은 활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포틀래치입니다. 쿨라라고도 합니다. 쿨라는 원(圓)을 뜻합니다. "마치 하나의 원에 휘말려서 그 원의 주변을 따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규칙적인 운동을 계속하는" 증여제도를 따라 이 거대한 범위에 분포한 섬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럼 포틀래치는 무역행위인 것일까요? 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흥정을 거듭하는 김왈리와 포틀래치는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포틀래치, 쿨라는 귀족적 행위라고 모스는 말합니다. 후하게 퍼주고, 그럼 받는 자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받고, 하지만 다시 그도 더 많은 양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증여를 하는, 그런 퍼포먼스를 거듭해 나가는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이윤을 남기는 무역행위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는 활동이지요. 게다가 이 부족들은 서로의 물건을 교환해야 하는 뚜렷하고 합리적인 이유(이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포틀래치를 계속 행합니다.
이 교환-증여 체계에서 물건은 귀찮은, 짐이 됩니다. 그도 그럴게 받은 사람은 "상대방을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속에 던져버리기도 하"는 등 파괴 퍼포먼스를 하며 상대방을 압도해야 하는 도전을 받거든요.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입니까...하지만 이 향연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경제적 이윤 이외 교환 자체가 가져다주는 관계성, 그리고 그 안에서 확보하게 되는 지위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물건에 영이 있어 그것을 다른 것에 얼른 넘겨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덜합니다. 축적을 부의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물건을 주면 '잠자코 받고 있을 수만은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합니다. 주고, 받는 관계에서 받고만 있는 자리가 단지 '개이득'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ㅋ 단순한 물건의 이동과 소유의 향유는 없고, 거기에는 반드시 물건에 녹아있는 시간과 기억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음 시간은 <증여론> 끝까지 읽습니다.
화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