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론』을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 챕터에서 모스는 로마, 게르만, 힌두 등 여러 문명과 문화에서 증여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현대사회에 잔존해 있는 증여의 그림자를 추적하고, 어째서 우리가 그것을 가치화하고 함양하려 노력해야 하는지를 논합니다. 모스의 결론은 약간 힘 빠지는 것이긴 했습니다. 모스는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는 원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단순한 풍요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는 ‘주고받는 후함’을 가치화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가 연구한 부족사회나 고대사회와 현대사회는 엄연히 다른 경제적 · 정치적 · 기술적 조건 속에 있는데, 그저 증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물론, 그의 결론이 조금 투박하다고 해서 모스의 연구 자체의 가치가 저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호가 과제에서 잘 이야기해주었듯이, 모스는 부족사회의 구조와 그곳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자명성을 되묻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족사회를 현대사회의 전단계나 유아기 같은 것으로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거기에서 ‘단순한 교환’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또한 그들을 우리의 가치 안에서 보려하지도 않습니다. 욕심 없고 선량하며 공동체 지향적이라는 식으로 우리의 가치를 투사하여 부족사회를 이상화하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지요. 모스는 부족사회에 지금 우리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경제적 구조와 가치체계, 관계의 양식, 감수성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한 듯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냅니다. 이익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소유란 무엇인가? 풍요란 무엇인가? 모스의 책을 읽다보면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레 제기되는 것은 모스가 취하고 있는 관점의 독특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떠한 동등한 동기가 트로브리안드 섬의 추장,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 안다만 섬의 추장 등을 자극시킨다 하더라도, 또는 과거에 관대한 힌두인, 게르만족과 켈트족 귀족의 증여와 지출을 부추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인 · 은행가 · 자본가의 냉정한 동기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이들 문명에서도 이익을 추구하지만 현대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 재산을 모으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출하기 위해서,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충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또 한편으로 교환을 하지만, 그 대상물은 특히 사치품 · 장식품 · 의복이거나 즉시 소비되는 물건, 향연이다. 받은 것 이상으로 갚지만, 그것은 처음의 증여자나 교환자를 압도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지연된 소비’로 인해 그가 입은 손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익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이익은 우리를 이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것에 불과하다.”(마르셀 모스, 『증여론』, 한길사, 269~270쪽)
이번에 읽은 결론부에서는 위의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재밌게도 모스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사회, 증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여러 사회들에서 행위 주체들을 추동하는 것이 ‘이익 추구’의 동기였음을 인정합니다(“부의 순수한 파괴조차도 그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익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대응하지 않는다. 이 위대한 행위조차도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267쪽). 그들도 분명 이익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특별히 더 이타적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 다만 그 이익추구의 방식과 성격이 지금 우리와는 판이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토로브리안드 섬의 추장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은 열심히 재산을 모으겠지만, 거기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동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써버리기 위해서, 남에게 줘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상대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향연을 베풀기 위해 재산을 축적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재산을 모으고자 할까? 물론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생존하려면 돈을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생존’을 위한 축적의 한계는 얼마 만큼일까요? 한 철을 날 수 있을 만큼이면 될까요, 노후를 보낼 만큼은 쌓아둬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익추구와 축적을 중요시하는 반면, 쌓아둔 것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과 지혜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사적인 소비행위로 수렴되거나 또 다른 축적을 향해가는 것 같습니다(재투자). 모스의 연구는 이것이 우리의 본성에 맞는 방식인지를 되묻게 합니다.
모스에게서 얻은 질문을 품고 다음주에는 더 케어 컬렉티브의 『돌봄선언』을 읽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