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더 케어 컬렉티브의 『돌봄선언』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더 케어 컬렉티브라는 수수께끼 같은 집단은 2017년 런던에서 시작된 학술 모임이라고 합니다. 돌봄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어 활동하는 중이라고 하네요.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무관심(carelessness, 돌봄의 부재)의 지배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기본적 형식을 ‘경쟁’으로 상정하고 개인을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이상적 시민을 자급자족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 안에서 ‘돌봄’에 관한 문제화가 불가능해져버렸다는 것이죠. 확실히 이러한 가치체계 하에서 다른 이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상태, 타인의 손길에 의존한 상태는 일종의 질병이나 결함,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존이란 반드시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의존이란 몸을 가진 모든 존재의 필연적인 삶의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돌봄선언』의 저자들은 부자들의 의존이라는 역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부유층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의존하는 이들입니다. 유모, 가정부, 정원사 등등, 그리고 집 밖에서 그들이 소비하는 수많은 서비스들과 재화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자기 손으로 구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언제든 그들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해고하고 다른 이들로 대체할 수 있다는 자율성으로 의존을 은폐하고 있을 따름이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의존을 화폐를 매개로 한 ‘거래’의 모델에 의존하여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무리를 이뤄 살아가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신진대사를 하는 한 다른 존재들에 의존하고, 그들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봄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방치하는 것은 괜찮은 일일까요? 다른 이들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그들의 무능이나 결함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저자들은 ‘난잡한 돌봄’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게이 운동의 맥락으로부터 차용-변형한 이 개념은 기존의 친족중심적인 돌봄과 배제와 혐오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의 형성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선언문’인지라 구체적인 사례나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아마도 다양한 우정의 관계 안에서의 상호돌봄을 실험하고 거기에 정치적-윤리적 중요성을 부여하며,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그림인 듯합니다. 난잡한 돌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소위 ‘MZ세대’가 돌봄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갈림길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 우리 세대의 욕망은 기존의 위계적이고, 친족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돌봄의 관계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족 안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런 식의 전통적 관계 형식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거부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우리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살핌의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될 때 우리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까요? 아니면 새로운 관계의 양식과 돌봄의 기술을 발명하게 될까요?
“우리 모두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해 양면성을, 심지어는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가장 멀리 떨어진,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실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양면성이 종종 억제되긴 하지만 마찬가지일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단 복잡한 갈등 관계에 함께 얽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그 강력한 결과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아울러 인식하면―우리가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돌봄에 대한 상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유다.”(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니케북스, 175쪽)
더 케어 컬렉티브의 논의에서 핵심은 역시 상호 의존성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고 포용하는 것. 그것이 돌봄에 관한 실천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간단히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러한 방식으로만 실존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곧바로 다른 이들을 돌볼 의무로 번역되는 것은 아닙니다. 돌봄은 계약이나 교환이 아니지요. 그리고 우리 실존의 의존성은 그 안에 복잡한 갈등관계와 타인에 대한 공격성까지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누구와도 어떤 방식으로도 얽히지 않겠다는 결벽증적 개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유연하면서도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고 의존과 자유를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관점을 형성하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다음주부터는 3주에 걸쳐 이반 일리치의 『젠더』를 읽습니다. 증여와 돌봄, 그리고 젠더. 이전 텍스트와의 연관성 속에서 공부의 주제가 점차 입체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2장까지(~66쪽) 읽고 과제를 작성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