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젠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리치는 여성에 대한 경제적 성차별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차별 하면 유구한 가부장제의 유지에 원인을 돌립니다. 여성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회적 활동에서 배제해 온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여성은 억압받아 왔다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고용의 기회와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성별에 따른 차별을 규탄하고, 그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봐 주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성차별의 간극은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성차별에 대한 상식적인 수준의 진단과 해결방안입니다. 그리고 딱히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용되지 못하거나 낮은 임금을 받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 즉 희소성의 획득을 기반으로 한 경제를 제대로 보고 또 그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문화를 문제삼지 않으면 경제적 성차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남녀 모두가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당위에 휩싸여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키워드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고유한 문화적 젠더가 소거되고 모두 경쟁적인 '경제'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문화적 젠더와, 젠더가 소거된 중성적인 사회에 성립된 극단적인 성(性)을 구분합니다. 모두 고유한 젠더에 따라 활동영역에 나뉘어져 있을 때와 달리, 중성적 사회에서는 오히려 극단적인 성과 그림자노동이 성립된다고 말이지요.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합법적인 임금노동만으로 경제성장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경제성장은 단순히 많은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생산'만 한다고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경제성장은 늘 '소비'라는, 상품에 가치를 더해주는 무급의 그림자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대표적인 소비주체는 '가정'과 '가정을 책임지는' 여성입니다. 이러한 그림자노동을 주도하고 또 그림자노동을 은폐하고 폄하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제'와 '성장'을 추구하기 때문이고요.
그림자노동이 여성에게 지워지는 방식은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만 보아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정규직 여성의 연평균 소득을 남성의 연평균 소득과 비교해 보면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듯 여전히 3대 5의 비율에 머물러"있습니다. 그 결과 여성은 중성적 임금노동에 뛰어드는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는 임금차별을 겪으며, 그 결과 그림자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는 압력에 노출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젠더>를 읽으며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림자노동에 종사할 압력을 겪는 여성을 해방하기 위해, 이 유구한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일까? 이반 일리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사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돈으로 환산하든, 그 가치의 총량은 임금 노동의 가치 총량을 넘어설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할뿐더러 중성화된 산업사회가 그에 대해 임금을 지불할 능력도 없다는 것. 어떻게 보면 산업사회는 그림자노동 착취 없이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사노동은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남성도 가사노동에 똑같이 참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그럴 경우 "여성과 남성 사이에 경쟁과 불화를 부추기는 장을 열고 있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가사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그렇기에 '하찮은 일'로 만들 공산이 크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일을 하는 건 단순히 수고를 대가로 돈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관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있고 그것을 해냈다는 성취감도 일을 하는 동력이 되지요. 그런데 가사노동만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그렇기에 '꼭 그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치부됩니다. 이때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가뜩이나 3:5라는 절대적인 임금격차에 시달려 가사노동에 내몰리는 동시에, 자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에 노출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반 일리치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는 페미니즘이 단순히 성 해방이 아닌, 사회 전반의 혁신을 도모하는 '소수적' 운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은 <젠더> 5장까지 읽습니다.
화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