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런 기사를 봤습니다. ‘여진남보’라는 말, 그러니까 청년 세대의 경우 여성들이 진보적이고 남성들이 보수적이라는 말이 객관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순한 편견인지에 대해 다루는 글이었는데요. 우리 사회는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상당히 모순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대 남자’ 혹은 ‘20대 여자’는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안에서도 경제적 조건에 따라, 각자가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따라,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팔로우하고 소비하는 컨텐츠, 친숙함을 느끼는 문화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지닌, 환원불가능한 부분집합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할 텐데요.
다른 한편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면서도 그러한 구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단지 생식기의 모양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 각각이 정치적 장에 접속하는 방식, 자신의 노동과 관계 맺는 방식, 경제적 주체로서 행위하는 방식이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무시한 채 양측의 성향을 ‘진보’ 혹은 ‘보수’라고 뭉뚱그릴 수 있을까요? 여자와 남자가 단순히 신체적 차이만을 지닌 동질적인 개인들이라면 더 이상 여성, 남성은 유의미한 범주나 집합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여성과 남성이 정말로 다른 존재라면 둘의 차이를 하나의 기준 안에서 파악하려 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접근방식일 겁니다.
“현대의 성차별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남녀를 동일한 성으로 통치하려는 계획에 이바지한다.”(75쪽) 일리치가 인사이트를 줍니다. 일리치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성차별주의는 남녀를 동일한 성으로 통치하는 데 기여합니다. 어떻게 ‘차별’이 ‘동일화’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일리치는 여성을 생물학 · 인류학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보는 유사 과학적인 성차별주의, 남성의 우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러한 사이비 학문들이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기에 앞서서 둘 사이에 존재해온 젠더적 규범들을 건너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려 한 것 같습니다.
일리치가 비판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은 하나의 관점으로(자신들의 근대적이고 산업화된 관점으로) 남성의 노동과 여성의 노동, 남성의 역량과 여성의 역량,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를 일괄적으로 인식하고 가치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토착적인 문화에서 여성이 남성과는 겹쳐질 수 없는 규범과 영역과 활동의 방식 및 존재의 양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합니다. 그렇게 여성을 ‘제 2의 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일리치가 우려하는 것은 진보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동일화하는 관점 자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하나의 시선으로 파악하고 비교할 수 있다는 관점을 내면화한 다음 성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을 거울에 비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일리치가 우려하듯 희소한 자원이나 권력, 지위 같은 것을 두고 남성과 여성이 경쟁하는 구도가 그려지게 되는 것이죠.
일리치는 좀 더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에 따르면 젠더의 상실에 의해서 더 많이 고통 받는 쪽은 여성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다릅니다. 각 문화에 따라 젠더적 규범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한쪽 문화에서 남성에게 할당된 역할을 다른 문화에서는 여성이 수행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여성입니다. 일리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다는 것과 거주한다는 것이 곧 몸을 탄생시킨다는 의미가 되고 새로운 생명의 흔적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은 오로지 여자의 경우뿐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남자가 오두막을 짓고 담장을 세우고 비탈을 일구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이런 일을 여자가 한다. 하지만 생명이 몸을 얻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오직 여자로부터만 가능하다.”(121쪽)
일리치는 여성을 신비화하거나 타자화하고 있는 걸까요? 본인이 남성, 여성의 생물학적인 구별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으면서, 그는 여전히 여성 ‘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이런 의문을 갖고 『젠더』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일리치의 관점에 스며들어버린 걸까요? 나름대로 일리치의 관점을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설명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생존’이 아니고 그들의 문화는 ‘본능’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상징체계를 함축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을 ‘사회적인’ 요인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분명 남성과 여성은 다른 신체를 지니고 있고 특히 여성의 경우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토박이 문화 안에서 여성의 존재방식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을 겁니다. 여자는 교역을 담당하기도 하고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여성의 신체성과 감수성을 문화적, 사회적으로 번역해낸 결과가 아닐까요?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성의 신체성이나 감수성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그것을 번역해내는 방식은 문화나 시대에 따라 무궁무진할 수 있겠지만 분명 어떤 ‘여성적인 것’에 대해 모호하게나마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무한성이지만 남성성과는 그 색깔이나 리듬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빙빙 돌아 다시 젠더의 상실이 여성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제 또래 친구들의 우울증에 대해 생각합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여자인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우울증에 걸렸다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거나 약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자의식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거라고만 생각을 했고, 그런 특성들을 여성들이 갖는 경우가 많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죠. 그런데 어쩜 이것이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가 상실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과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생존’에 몰두해야 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하고, 빠르게 적응을 해야 하고, 쉽게 정을 주거나 과도하게 마음을 써서는 안 되는 그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조건. 모두를 하나의 가치로 평가하고, 모두가 (자본의 관점에서) ‘생산적’이어야 하는 젠더 상실의 사회가 여성들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몇몇 여성적인 특성들이 나약하거나 쓸모없거나 무력한 것과 동일시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젠더』를 마저 읽으며 일리치의 논점과 우리의 현실을 계속 중첩시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젠더』를 끝까지 읽고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