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밴드
Youth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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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운동가와 학자들이 장애가 이 세계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장애를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장애를 갖게 될 때 축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쟁, 도살장, 농업, 산업오염물, 화학물 중독, 사고, 병, 빈곤, 혹은 사회적 서비스의 부재 등 그 원인이 무엇이든 외상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장애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 몸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왔다"에 그친다면, 장애가 있는 내 친구들이 스스로를 불의를 나타내는 표상으로밖에 여기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대안적인 존재 방식, 그리고 특히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지금도 끼치고 있는 그런 불의에 저항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의 가능성이 더욱 사라져버린 그런 공허한 세계 말이다. 단순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치부하기에 장애는 너무나 복잡하다. 하지만 장애를 만들어내는 산업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판단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쉽다.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짐을 끄는 짐승들>, 오월의봄, p.321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자연까지 포함한 포괄적 의미로서 '장애'를 생각해 보면요...
그런 장애를 만들어내는 산업과 구조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을 의식있는 사람처럼 생각해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군요. 그냥 좀 주워들은 얘기로 딱 거기까지!
이게 얼마나 편하냐면 그냥 자본주의 나빠, 산업재해 나빠, 으... 자연파괴 어쩔... 자기를 선한 쪽에 놓고 반대편은 무조건 악이다 욕하기 딱 좋거든요. 쾌감 만족!!!
수나우라 선생님이 말씀하는 '장애'는 그런 이분법적 표상을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경제성장발전이 삶의 전부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장애를 우리 몸이 겪는 경험으로부터 이해하기!
그 몸을 외부요인의 희생자로 표상하였을 때, 장애는 불의의 표상이 된다니...
제가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몹시 부끄럽군요. 무의식적으로 장애를 불행이나 공포, 감상적 연민 또는 극복할 무엇으로 여겨왔을 겁니다.
장애의 가치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게, 아마도 개별적인 신체들이 모두 다르게 겪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된 신체가 아니라,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두하고 무언가를 해보는 신체로의 변환!
그래서 무수한 대안적 존재 방식이 필요하고, 그 가능성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을 불의로 치부하거나 선의로 둔갑시켜 낙관하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또한 불의라면 그 불의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불의의 악업이 쌓이지 않게 저항하는 것이 능동적인 선의의 작동법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인용해준 문장 덕분에 제가 가진 개념 하나를 찬찬히 돌아 볼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생각의 씨앗을 나눠주세요~~(づ ̄3 ̄)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