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않게 맡겨진 강의 후기를 바로 거부해볼까도 싶었지만, 책과 강의가 너무 좋아서 뭔가 조금이라도 더 흔적을 남겨보고 싶어 말없이 받아들이긴 했는데... 벌써 가슴을 훅 치고 올라왔던 그 뜨거운 불덩어리의 기억이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며 소감 몇 마디를 남겨보려 한다.
일반학생과 특수학생 간 통합 교육이 강조되면서 일반 인문계고등학교인 우리 학교에도 특수 학급이 개설되어 최근 장애 학생들과 함께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증세(?)가 심하지 않은 아이들은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특수교사의 지도하에 별도의 교육을 받고 있다. 일반 학급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낙인효과를 우려해 교사들도 쉬쉬하며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는데 사실 티가 안 나긴 힘든 듯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 눈치다. 그런데 요새는 워낙 장애와 관련된 정규 교육이나 매뉴얼들이 차고 넘치는지라 애들이나 선생들이나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잘못 대했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니 조심스레 배려하는 척(!)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아예 신경끄기. 물론 교사인 나도 다르지 않다. 때 되면 불을 뿜어가며 장애 인권 강조하고, 심지어는 고병권 샘까지 모셔다 전교생 대상으로 관련 특강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시에는 크고작은 사안으로 시끄럽지나 않기를 바랄 뿐, 공부 때문에 바쁘거나 근심이 많은 덕분에 그 아이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교육 문제에 대해선 1도 신경쓰지 않고 지낼 정도로 무심한 게 바로 나라는 것.
이 책 ‘짐을 끄는 짐승들’은 몇해 전 앞부분만 조금 읽고 좋은 책이군 하고 쳐박아 두었다 이 기회에 다시 꺼내 끝까지 읽게 되었는데, 읽고 강의듣는 동안 강사였던 규창샘이 느꼈던 것 못지 않은 ‘정서적 충격’이 내게도 좀 있었다. 규창샘 강의안을 보면 이 책은 ‘장애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억압적으로 작동되는 기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장애 차별과 동물 차별이 한 뿌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신체의 형태와 능력, 행위와 유용함을 동일한 척도로 환원하는 상식을 문제삼고’ 있다. 한 마디로 단순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인간주의, 비장애중심주의적 인식체계 및 그에 기반한 윤리의식 일체와 대결하며 그것들을 한방에 넉다운시키고 있다. 저자는 온몸으로 싸워온 자신의 경험과 장애 및 동물 해방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반자연적인 폭력과 억압적 사고 위에 형성된 것인지를,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동물과 비인간 동물들의 삶이 어떻게 얼마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가고 있는지를 대단히 감동적이고 설득력있는 언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역이며 들뢰즈, 베르그송, 아니 그동안 읽어온 모든 텍스트들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삶의 진경이 그 안에 다 있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공부의 최전선이 바로 이 지점이라 선언하고 싶기까지 했을까.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돈 몇 푼 들여 장애를 고칠 수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길을 선택하겠다고? 장애를 가진 자신의 신체를 세계와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는 예술적 장으로 삼을 수 있다고? 자신들의 장애 치료를 위해 이용당하는 몇마리 동물이 뭐 대수라고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거지? 헉, 입이 벌어졌다. 공부하면서 말로만 듣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온전한 긍정, 나의 해방이 타자의 해방과 직결되는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장애인이 돼 보지 못한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이 또한 얼마나 반운명애적 사고이겠는가마는). 여튼, 그간 온갖 좋다는 책들을 버무려가며 읽고 토론하고 또 그 과정에서 심히 괴로워하며 글들을 써가는 날들을 오래 지켜오고 있으면서도, 나라는 인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규문에서 얻어들은 익숙한 언어들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그것들을 말이 되게 엮어 드러냄으로써 공부한 티내는 데 급급했던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많이 쓰라렸다. ‘나의 해방과 타자의 해방이 맞닿아 있다’는 테일러의 말 앞에서 대체 난 그동안 뭘 해 온거지, 하는 생각에 그간의 모든 과정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도 싶었다. 어쩌면 고만고만한 생각과 욕망들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정전으로 인정받는 난해한 텍스트를 짐짝처럼 짊어지고선 무슨 말인지 알아먹느라 낑낑대고, 그러는 서로들을 우쭈쭈해가며 공부라도 하고 있으니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거겠지 하고 자위나 해온 건 아니었을까 싶은. 외부나 타자들에 대해서도 머리로는 확 열린 듯한데, 근원적인 감각과 일상성의 차원에선 뭐라 말하기 겸연쩍은 수준으로 닫혀있는 몸이라니. 그러고보면,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나 시선 자체가 비장애중심주의였다. 차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잠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정상성의 잣대를 들이대기 일쑤고,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게 내 임무라는 생각에서도 놓여나고 있지 못하다. 빌어먹을 대학 서열서부터 시도때도 없이 작동하는 동일화의 기제들이라니(사람들아, 더 이상 내게 교사를 묻지 마시라ㅜ). 장애해방과 동물해방, 그리고 그것들의 하나됨을 사유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득한 일이었다. 내 공부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까발겨지는 순간!!!
저자는 ‘불구의 시간’을 말하고, 규창 선생 또한 그것에 기대어 본인 공부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는 듯했다. 저자는 ‘장애가 능력을 발휘하는 조건이자 다른 모든 억압을 걷어내는 저항의 몸짓으로 창조되는 순간’을 일러, ‘불구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정상성에 포획되지 않음으로서만 가능한, 습관적 일상의 리듬에 균열을 내면서 끊임없이 분기하는, ‘사건’으로서의 시간에 다름아니라는 것. 규창은 이를, 삶 앞에서 맞딱뜨리는 무수한 질문들에 대해 쉽게 답을 내리지 않고 ‘매달아’ 놓는 일에 가까운 것이 아닐 것인가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불구의 시간’을 사는 것은 해결불가하고 복잡미묘한 삶의 난제들 앞에서 넋놓고 방기하고 외면하는 태도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신체와 언어들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신체적 감도를 높이는 일이자, 정상성의 척도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과 능력이 자아내는 시간 감각을 온전히 긍정하는 일일 것이라 했다. 어쩌면 이는 <중용>에서 말하는 ‘時中’을 사는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려운 만큼 우리의 시간과 관점, 가치, 자리들을 ‘불구화’하는 일은 또 얼마나 쉽지 않을 것인가 싶다. 규창 선생 또한 본인의 공부와 삶 속에서 이를 풀어가는 것을 당분간의 과제로 삼은듯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고, 강의 들었던 많은 분들도 ‘불구화’라는 개념에 많이 마음들이 흔들리지 않으셨을까 싶다. 나도 그랬다!!! 좋은 강의 준비해준 규창에게 깊이 감사하고, 나의 동학들께서도 이 ‘불구화’의 행렬에 동참하실 수 있길 강권해 본다. 늦은 후기 죄송하고요, 다음 강의에 뵈올 수 있길.
"내가 주역이며 들뢰즈, 베르그송, 아니 그동안 읽어온 모든 텍스트들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삶의 진경이 그 안에 다 있었다."
선생님으로서의 지위와 그동안의 공부를 훅 비춰지면서 느끼셨던 '정서적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네요!!
강의 후 질의시간에 '불구의 시간' 혹은 '불구화'를 하나의 개념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샘의 질문에, 혼자서 비슷한 개념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탈영토화', '-되기', '위버멘쉬', '기계', '가치의 가치를 묻기' 등등.
그런데 그게 쉬운듯 하면서도 잘 안 되더라구요. 테일러가 말하는 '불구성'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개념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현실에 맞닿은 용어 같더라구요. 추상성이나 일반성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다양성을 말하고 존중을 소리쳐도, 비장애중심주의적 뿌리를 떨치기가 어려운 것 아닐까요.
제 안의 오만한'인간'을 계속 넘어가기 위해서라도 장애학과 동물해방과 불구의 문제를 계속 공부해가야 할 듯합니다.
우리의 공부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수 있는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연구실 안에 있으면서 우리의 언어가 '비장애인'들과의 소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교육 현장에서는 더욱 그랬을 수 있었겠네요. 말씀하신 대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용함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느끼는 한편,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그러한 능력을 갖춰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점에서 연구실에서 공부한다고 책임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후기를 읽으면서 통감합니다. 식어가는 기억이 아직도 뜨끈뜨끈하군요. ㅎ
"고만고만한 생각과 욕망들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정전으로 인정받는 난해한 텍스트를 짐짝처럼 짊어지고선 무슨 말인지 알아먹느라 낑낑대고, 그러는 서로들을 우쭈쭈해가며 공부라도 하고 있으니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거겠지 하고 자위나 해온 건 아니었을까 싶은"
공감이 갑니다... 앎과 삶이 1mm도 분리되지 않은 것 같은 수나우라 테일러의 글을 읽고 저도 계속 제 공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지성이 나의 장신구가 아니라 서로를 해방하고 다른 존재를 환대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테일러가 커다란 숙제를 남겨준 것 같네요 ㅎㅎ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