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종이 만날 때 강의 후기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태라 후기를 써도 될까 고민하였지만 강의 후기이니 괜찮다는 혜원 선생님의 말에 힘을 얻어 씁니다. 메모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후기가 횡설수설이네요.
해러웨이를 읽을 때마다 과연 응답하기가 무얼까 생각해 보고는 합니다. 처음에는 타자의 어떤 행동에도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기쁨도 고통도 외면하지 않기,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응답한다는 것은 상대(혹은 상대의 자리)를 똑바로 바라보기,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요. 반려종으로 함께 되기란 그런 응답을 통해 서로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같이합니다. 그 자리의 크기는 서로 마주한 상황마다 응답하는 정도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요. 부분적 연결들을 통해 반려종의 관계가 형성되고, 궁극적으로는 상대와의 합일성으로 확장되기도 하는 그런 것이요.
이번 강의에서 조금 의문이 들었던 지점은 바로 저 부분, 바로 외면하지 않기가 정작 해러웨이에게는 제대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그녀의 함께 되기, 응답하기가 책임을 말하는 것이라면 과연 공장식 가축 사육으로 인한 비인간동물의 전염병 창궐과 살처분이라는 에코사이드를 그들의 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모든 동물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든 육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해러웨이의 말대로 죽여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존재하기 위해 먹고 먹히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공장식 축산의 닭을 식육산업의 일방적인 희생자로 보지 않고, 인간이 그 관계에서 특권적인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은 과연 공장식 축산이라는 에코사이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트로피 사냥과 애완 동물화된 야생동물, 동물원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어떤 식의 응답하기와 함께 되기지만 그것이 인간의 특권적 측면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면 (모두 주체이고, 서로의 응답에 따라 함께 되기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인간이 특권적 주체가 아님을 부정하는 순간, 해러웨의 논의는 회피적이고 오히려 인간중심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녀의 놀라운 이야기들이 부지불식 허망한 말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때로 인간의 특권적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무구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들이 원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듯, 에코사이드의 희생자들 역시 원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의 서식지 파괴, 무분별한 야생동물 식용화 등에 대한 그들의 응답이라면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동물실험을 바탕으로 한 백신 제작으로 이어진 것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답하기와 함께 되기의 모든 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송이샘 언제나 고민이 듬뿍 담긴 후기와 질문을 남겨 주시는군요:D
말씀하신 문제는 이번 <종과 종이 만나다>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지점인 것 같아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비인간 행위자를 상상하기, 그런데 그때 행위자를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단독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선택할 수 있다고 간주되는)주체가 아닌 관계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해러웨이의 강점은 이 문제를 일제히 해결하려고 하거나 누구 하나를 무구한 희생자로 삼지 않고 함께 되기, 살기와 죽기를 구체적으로 고민한다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자기 자리를 떠나서 제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요.
확실히 해러웨이의 글들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갸우뚱하게 되고 우려스럽게 보이는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해러웨이가 말하는 '파트너 되기'라는 응답이 과연 어떤 것일까 의문이 들다가도, 그것을 우리가 아는 '주체'의 선택(자유의지를 전제한 선택)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닭과 같은 종들을 파트너이자 행위자(agent :행위자 혹은 행위소)로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칫 행위자를 독립 주체로, 응답을 선택으로 보면, 마치 그들이 맞이하고 있는 결과(식육동물로 길러짐, 에코사이드, 멸종, 전염병)가 그들이 의도한 것이고, 그러므로 책임도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식의 논의로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행위자는 관계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러웨이는 이야기했죠.
마찬가지로 응답 역시 사태를 문제화하고 사건화하는 시도와 더불어서만 구성되는 것 같습니다. 즉 응답은 미리 주어져 있는 선택지를 고르는 게 아니죠.
공장식 축산과 실험동물, 멸종과 판데믹 앞에서 어떤 방식의 응답을 꾸릴 것인가...
지금까지처럼 동물들을 희생자로 여기는 관점은 어디에 막혀 있는가...
그들을 역사와 관계 속에서 부단히 문화와 다른 종들(특히 인간들)을 생산해온 행위자로 보는 관점은 어떤 가능성과 위험성을 열어주는가...
해러웨이는 전자의 경우가 모두를 데려갈 수 있는 '보편 윤리'를 꿈꾸다가 늘 타이밍을 놓친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동물들 일반은 없고, 언제나 구체적인 조건에서 구체적인 몸으로 다른 종들과 상호 형성 중인 몸들만 있습니다.
그 형성 관계에는 수많은 부조리와 하자가 있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의 실존을 애도해가면서 가까운 연결 고리들을 바꿔가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들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해러웨이도 각자가 각자의 중요한 타자들과 구성하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제가 응답이라는 단순해보이는 말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송이샘 후기에 감사를 보냅니다!
인간을 '특권적' 주체로 보지 않는 해러웨이의 관점을 오해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해러웨이는 인간만 유일하거나 고정된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지 서로 얽혀 있는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가 평등하거나 대등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해러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거주하는 어질리티의 접촉지대에서 나는 '동등'에 관해서 그다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어떤 부인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권력과 통제를 행사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 초래할 중요한 타자들에 대한 결과들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는 공존의 맛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세계를 함께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294쪽)
오히려 인간을 '특권적' 존재로, 공장식으로 길러지는 가축들을 일방적 희생자로 보는 관점을 유지할 때 인간이 독점하는 책임에 대한 부풀려진 환상과 해방이나 자유에 대한 초월적 이상 외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 저도 해러웨이의 말하는 바를 아주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하지만 '특권적'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대등하지 않지만 특권적 주체도 없다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주 이론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아직 <종과 종이 만날 때>를 다 읽지 않아 더 이해를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강의 후기였으니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공장식 축산에서 인간이 독점하는 책임에 대한 부풀려진 환상이라는 말은 조금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 산업에서 부풀려진 책임이라는 게 뭘까요? 공장식 축산의 해방과 자유와 부풀려진 책임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가축에 대한 해방과 자유에 대한 초월적 이상은 공장식 축산에서의 해방과 자유와는 또 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