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결심했다.” 이 문장은 말린 과일을 수입하는 일이 아닌 철학하는 삶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을 때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 난 이 말을 카톡에 배경으로 저장해 놓고 때때로 보았다. 스피노자는 가업으로 내려오던 안정된 일이 아닌 다른 선택에 대해 ‘불확실한 어떤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잃으려고 하는 것은 언뜻 지각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내게는 삶에서 느끼는 공허감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에 나서려면 결심이 필요하다는 말로 읽힌다. 드디어 나도 이 말을 쓴다! 20대였던 그와 내 나이는 한 세대만큼 차이가 나기에 굳이 쓰기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쓰는 이유는 강제로 밀려남이 아닌 자발적 물러남이기 때문이며 다시 같은 판에서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仁治라는 자신의 뜻을 펴는 게 불가함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知其不可而爲之者였다.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행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구절에 가슴이 뛰는가. 예전에 아이들이 다녔던 대안학교를 널리 알리자고 공동체가 만든 회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는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 생각하고 매달렸다. 하지만 학교는 갈라지고 그때의 사람들과도 헤어졌다. 지금은 열심히 하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거라는 식의 로망은 갖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다소 멋지게 결정했는데 막상 퇴직 이후를 생각하면 돈 걱정이 앞선다. 매달 들어오던 월급 없이 지내는 것에 대한 막연한 우려인데 또 한편으론 돈이 내가 고민할 최우선 문제인가라는 의문도 든다. 돈이 전부가 아닌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도 경제적인 것과 거리가 먼 일을 찾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의 삶이 부유해 보이진 않아도 중심을 잡고 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당장 돈을 빌려야 할 처지가 아님에도 적다고 느끼는 건 지금과 똑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 때 따라오는 경제적 불안정은 너무 당연하다고 각오했음에도 그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내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명예와 부가 주는 이점을 포기한 스피노자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가는 공자가 그랬듯 나는 무슨 이유로 미리 앞당겨 퇴직하려 하는가.
나는 퇴직을 하면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거다. 예전의 나라면 ‘공부는 하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거나 ‘아직 어린애들은 어쩌고’라는 말들로 회피했는데 이제는 때가 무르익은 듯하다. 공부를 원없이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 출근길에서 현안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며 언제쯤 이 불안을 멈출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다. 돌아보면 몸이 있는 그 공간에 있기보다 근심과 함께인 날들이 많았다. 이렇게 불안해하다 삶을 마감하면 허무하겠다 싶었고, 자족(自足)이라는 말은 어떤 경지인지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내게 만족이란 일의 결과가 자랑스러울 때 느끼는 감정이다. 결과와 외부의 반응이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스스로 만족한다는 건 무얼까? 무슨 일에 대해서든 답을 알아 척척 처리하는 걸 말하는가? 아니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혹자는 지금 하는 그 자체가 나의 최선이라는 걸 알면 어떤 결과든 수용할 수 있고 그러면 과정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나의 최선이라는 걸 아는 게 과정을 긍정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행=최선이라면 사실 최선은 따로 없다 그저 행함만 있을 뿐. 쉽게 들리는 그 말을 좀 더 알고 싶고 체득하고픈 그 마음이 나를 공부로 이끄는 것 같다.
사실 은퇴할 나이라면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경험을 한 이후니 태어나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큼 어렵고 혼란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익숙했던 패턴과 전혀 다른 가치로 작동하는 공간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것 또한 사실이고, 무지하다는 면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어린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느낌은 더 초조하고 불안할 수 있다. 정년퇴직을 생각하면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느낌이라고 말한 선배가 있다. 잘 살아오던 길에서 강제로 떠나라며 밀리는 느낌이라는 거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얼까. 퇴직 이후 강제로든 자발적으로든 다른 세계로 들어가야 하고 그 길이 지금껏 걸어온 길과 달라 헤매는 때를 어리석음에 관해 얘기하는 산수 몽괘에 대비해 보고 이후 수천 수괘를 통해 퇴직 이후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보려 한다.
2. 몽으로써 바름을 기른다(蒙以養正)_ 山水蒙 ䷃
위에 간괘가 있고, 아래에 감괘가 있는 산수몽괘는 산 아래에 험함이 있는(山下有險) 상이다. 물러나면 험함에 곤궁하고 나아가면 산에 막혀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모습이 은퇴를 맞아 당황한 사람들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해 오던 일에서는 베테랑일지언정 그 길에서 물러나 어디로 갈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거대한 산 앞에서 길을 잃어 우는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늘 해 오던 일이 아닌 것에서 서툶은 당연하건만 나이가 그걸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건 나이가 들어서건 살면서 겪게 되는 무지의 순간에 몽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함이니, 처음 묻거든 고해주고 두 번 세 번 물으면 번독하다. 번독하면 고해주지 말 것이니, 정(貞)함이 이롭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사리에 어둡다는 뜻을 가진 몽(蒙)괘의 괘사는 형통하다로 시작한다. 蒙亨을 단전에서는 형통함으로써 행하는 것이니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하는 것(蒙亨 以亨行 時中也)이라고 말한다. 산 앞에서 멈춰 서는 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형통하다고 말한 이유는 험난함을 만나야 비로소 멈추고, 멈춰서야 다시 근원으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지욱 선사는 해석했다. 사실 우리가 잘 나갈 때 돌아보기란 쉽지 않아서 어딘가 걸려 넘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이어지는 단전은 몽매한 자가 형통할 방법을 알려준다. ‘눈 밝은 스승과 훌륭한 도반’을 의지하라는 거다. 다만 스승이 먼저 제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스승에게 질문한다. 몽매하다는 건 사물의 이치에 어두운 것인데 이에 대해 덮을 폐(蔽) 자를 썼다. 몽매함을 ‘가려짐’이라 말한 건 안에 무언가 있다는 뜻이고 이는 덮고 있는 가리개를 걷어내면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자기 안에 가려진 것이 무엇인지 동몽은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러니 스승에게 묻고 그 첫 물음에 스승은 배우는 자의 근기에 적합하게 답변한다. 동몽 역시 지키겠다는 간절함으로 질문을 해야지 두 번 세 번 묻지 않는다. 이를 시중(時中), 때에 맞는 가르침이자 배움이라고 한다. 匪我求童蒙, 童蒙求我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몽괘는 스승의 괘이지만 배움을 청하는 자에게도 해당한다.
오랜 시간 인문학 공부를 하며 자기 비하라는 단어는 걷어차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간간이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긍정하지 못할 때가 있다. 주로 누군가와 비교해서 못 한다고 생각하거나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한계 지을 때가 그렇다. 그러면 짧은 공부를 탓하며 좀 더 깊이 공부해서 지금 겪고 있는 불안들을 없애보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런데 몽괘가 형통하다는 단전을 풀다 보니 이 불안을 품고 있는 그래서 질문하고 있는 이 상황이 형통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몽으로써 바름을 기른다蒙以養正라는 표현은 가리고 있던 덮개를 치워 밝게 함을 말하는 동시에 몽함을 단서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펼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늘 몽한 상태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다. 계속 변하는 역의 세계에서 언제든 몽의 때는 올 수 있으니 그 몽매함을 반갑게 맞이하는 또 다른 해석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蒙以養正, 聖功也.라는 말은 스승과 제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몽으로써 바름을 기르는 첫 단계는 내가 몽하다는 것, 다시 말해 가려졌음을 아는 것이다. 무언가에 가려져 있음을 아는 신호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겐 다운되는 느낌과 누군가를 탓하게 되는 거다. 그러면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무언가에 가려져 생기는 어둠이 무섭고 겁나지만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는 게 두 번째다. 스승을 찾아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떤 덮개로 가리워져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스승을 찾아가는 자발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가려져 있는 내 마음 안에 함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힘든 일이 닥치면 숨고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외면해선 안된다.
대상전에서도 말한다. “산 아래에서 샘물이 나오는 것이 몽이니, 군자가 보고서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며 덕을 기른다. 山下出泉, 蒙, 君子以果行育德.” 산 아래에서 나오는 샘물은 아직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길을 터주는 대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군자는 덮여있는 가리개를 어떻게 치울지 결정해야 한다.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하는 것을 물길을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어리석음은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문제상황이기도 하지만 되려 관성으로 굳어버린 기존의 사유에 다른 길을 낼 가능성이 된다. 하지만 몽한 상태 그 자체가 기쁨을 주는 건 아니다. 몽의 상태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 육덕育德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힌트를 수천수괘에서 볼 수 있다.
3. 느긋하지만 강건하게(飮食宴樂)_ 수천수水天需 ䷄
몽(蒙)은 어림이니, 물건이 어린 것이다. 물건이 어리면 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需)로써 받았다. 蒙者는 蒙也니 物之穉也라 物穉不可不養也라 故受之以需
서괘전에서 어린 것은 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需)로 받았다고 설명한다. 기른다고 하면 양육의 도가 나올 법한데 기다림이 이어진다. 기다림이 나온 이유를 묘목이 자라는 것에 비유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당한 햇빛과 바람과 물이 있어야 자란다.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고 매일 만져보며 잡아당겨도 곤란하고 알아서 큰다며 쳐다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이를 지욱 선사는 시절의 인연(時節因緣)을 기다려야 하고, 인연이 도래하면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나무를 원인(因)으로 보고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을 조건(緣)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조건을 다르게 하면, 예를 들어 비료를 준다거나 병충해를 막는 작업을 하면 나무는 더 잘 자란다. 하지만 가뭄과 홍수 같은 변수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으니 인연을 하나의 인과로 엮을 수 없다. 우리가 아는 혹은 모르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나무는 제각각 다르게 자라지만 확실한 건 무언가를 기르는 양육에 인연이라는 환경조건과 때라는 시간은 필수라는 거다. 이를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다림에 대해 공영달은 信이 없으면 서지 못하니(无信卽不位) 기다리는 것은 오직 信이라고 한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단지 나무가 잘 자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기보다 나무가 자라는데 그 모든 과정이 필요함을 아는 것으로 보인다. 수괘의 괘사가 ‘기다림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인연 조건을 아는 것과 관련 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매일 똑같아 보이는 나무가 자란다는 것,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조건과 원인이 얽혀있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일부분이라는 것 말이다. 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나갈지 자라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수괘의 구성을 보면 아래에 건괘, 위에 감괘가 있으니 외부가 험하다. 험함이 앞에 있지만 내면이 굳세고 강건하면 빠지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 여기 기다림의 핵심이 있는데 바로 건괘의 강건함이다. 하괘에 건괘가 배치되어 있다는 건 기다림은 늘 뜨고 지는 태양처럼 군자의 종일건건함을 전제로 한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하는 것이 나무가 자라는데 극히 일부임을 알면서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선택에 대해 제일 걱정했던 부분을 앞으로 만날 험난함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겐 돈과 관계가 첫 번째였다. 나의 지출 내역을 보면 누군가와 무얼 먹거나 선물을 하는 게 대부분인데 이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난 적절하게 주고받는 것이 관계를 더 깊게 맺고 오래 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그 주된 방법이 돈이었고 퇴직 이후에 그 방법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불안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엔 오해가 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돈만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관계를 잘 맺고 싶어 한들 그 사이에 끼어드는 무수한 변수와 그에 따른 서로의 마음을 다 제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돈과 관계가 중요하긴 해도 제일 크게 고민할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는 게 아니라면 돈이나 관계는 겪어봐야 알 수 있고 그때 해결해도 된다.
두 번째 어려움은 앞에서 말한 자격지심으로 인해 오는 파장이다. 내년 프로그램이 올라간 이후 도반들은 두 개의 프로그램에 내 이름이 올라간 걸 보고 한마디씩 건넨다. 튜터를 하라고 했을 때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욕심에 선뜻 대답은 했으나 채운샘과 연구실 식구들이 나에 대해 과대평가하면 어쩌지하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공부한 시간만 보고 기대가 있을 거라 우려가 되는 한편으론 같이 공부한 시간을 생각하면 그렇게 평가할 리는 없다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튜터라는 역할에 대한 고민보다 나는 초보니 옆 사람에게 잘 맞추고 기대자고 생각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무조건 배우고 맞추려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기대기만 하면 문제가 생긴다.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위치시키다 보면 배움에 따른 위계가 생기고 관계에 더 소극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 서로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수괘의 모습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음식을 먹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象曰, 雲上于天, 需, 君子以飮食宴樂.
수괘의 대상전에서 ‘하늘 위에 구름이 있다天上有雲’이 아니라 ‘구름이 하늘로 올라간다雲上于天’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에서는 구름이 강조되어 활발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런데 군자는 이를 보고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기면서 비가 내리길 기다린다고 하는데 이는 좀 상반되게 보인다. 구름이 하늘 위로 올라갔으면 어떻게든 비가 내리게 애써야 할 것 같은데 음식연락을 하라니 말이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 우선 나무를 심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구름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은 비가 내릴 조건이다. 다만 언제 비가 되어 내릴지에 대한 결정은 군자가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가 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으라는 게 아니다. 묘목이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뿌리와 잎으로 영양소를 받아들이는 활동을 쉼없이 하는데 그게 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 활동이 없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그러니 수천 수의 상황처럼 안은 강건하지만 앞에 험함이 있다면, 다시 말해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득한데 아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억지로 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신 그 시간을 역량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데 그 모습이 음식연락이다.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벌이고 즐긴다는 말에 결혼식 뒤풀이가 떠오르지만 규문의 점심시간도 비슷하다. 결석은 할지언정 간식 당번은 거를 수 없다는 우리들의 불문률처럼 맛난 음식과 왁자지껄한 수다는 글쓰기의 압력을 견디게 하고 공부에 활력을 준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사건에 슬프고 놀라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며 웃고 삐지고 풀고 떠들다 보면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을 살 수 있다. 이런 음식연락은 내가 잘해서 혹은 누구 한 사람이 훌륭해서 그 사람 말만 잘 따르기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규문에 온 이유는 다 다르지만 공통점을 찾자면 잘 살기 위해서다. 에세이는 그 과정을 통해 질문이 달리지고 다른 시선이 펼쳐짐을 알기에 잘 사는 삶의 밑거름이 되지만 동시에 익숙한 회로를 변형시키기에 힘이 든다. 이 과정을 음식과 친구들과 함께할 때 즐거움이 될 수 있고 긴장된 마음도 풀 수 있다. “누가 음반을 더 많이 팔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목요일을 더 즐겁게 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콜드플레이 프로듀서의 말처럼 음식연락은 좋은 결과와 상관없는 기다림의 새로운 이미지이다. 나무가 자기 할 일을 하듯 건괘의 강건함이 밑바탕이 된 음식연락은 그 자체가 역량이다.
4. 왁자지껄함의 힘
에세이를 쓰는 과정에서 모른다는 걸 아는 것 자체가 형통하다는 걸 알았고 잘 모른다는 자격지심으로 가려진 덮개를 치우는 일은 동시에 그걸 깨치고픈 마음이 함께 있음을 알아 스승과 도반을 찾아 나섬으로써 가능함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방법인 음식연락을 주역팀의 왁자지껄함으로 얘기했다. 왁자지껄하다는 건 여러 소리가 동시에 들어와 뒤엉킨다는 걸 말한다. 소리에는 위계가 없어 고막을 진동시키고 뇌에 전달하여 생각을 흩트린다. 토론에서 나누는 말들과 에세이에 관한 지적들, 산책길에 주고받는 말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혼자 책을 읽을 때 역시 나의 고막에 꽂히는 작가의 말들은 나를 뒤흔든다. 어떤 소리는 들어오고 어떤 소리는 흘리면서 생각에 균열이 난다. 이렇듯 혼자 혹은 함께 읽고 쓰는 경험은 여러 다양한 소리들이 부딪쳐 소란스럽고 때로 거부반응이 일기도 하지만 다른 길을 내주기도 하는데 나는 이를 왁자지껄함의 힘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 소음 속에서 내가 하는 건 온몸과 마음을 열어 반응하는 거다. 이 경험은 내게 어떻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무가 온몸으로 영양소를 흡수하듯 나는 그렇게 현장에 참여하리라. 여기에 결과를 바라는 조바심은 바로 쳐내면서 말이다. 그러면 내가 열심히 해서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 다시 말해 역량을 갖춰야 말할 수 있다는 것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현장의 시끄러움을 인정하면 새로운 길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실수와 어설픔 역시 긍정할 수 있고 참여 자체가 역량이 된다. 나의 한 걸음이 팀에 영향을 주고 팀에서 함께 나눈 호흡이 또 나를 바꾼다는 공동체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배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것이 자족을 꿈꾸는 나의 첫걸음이고 내년에 본격적으로 이 실험을 한다. 아니 이미 실험 중이다!
샘을 글을 읽으며 남편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정년퇴직을 생각하면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느낌"이고 " 잘 살아오던 길에서 강제로 떠나라며 밀리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그 사람의 마음이 읽히네요. 남편의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부하고는 인연이 멀어진 터라, 심히 걱정이 되는군요. 아내인 제가 에세이를 쓰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걸 보면서 '참 이상하게도 산다'며 걱정하며 넌지시 말리려는 행동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죠. 남편에게 공부는 스펙과 관련된 공부이미지밖에 없을 테니끼요.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는 저로서는 공부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준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돈 들여 경험하는 그 많은 것들이 별로 부럽지가 않아서^^ 고정 수입이 끊긴다고 남편에게 바가지 긁을 일도 없을테구요...평생 가족 먹여살린다고 수고했다고, '당신이 보살'이라고 마음 깊이 다독여 줄 일이 남았네요.
퇴직 이후를 맞이 하는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저도 분발하겠습니다.
박규창
2023-12-27 10:41
정년퇴직. 아직 경험한 건 아니고, 어쩌면 경험하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그동안 살아왔던 길에서 이탈한다는 게 한순간의 결심만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는 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부를 재밌게 하시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삶으로 일상을 재배치하는 것은 꺼리시더라고요. 공부가 대단한 게 아니라 다른 삶을 감행하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뜻이겠죠? 그런 점에서 자꾸만 가리고야 마는 마음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대목에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말로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실제로는 모래성보다 허술한 게 우리의 결심인데 그것들을 보는 작업도 뭔가... 뭉클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다른 삶에 대한 결심을 다지고, 단단하게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퇴직자의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결심을 다지는 글이란 점에서, 뭔가... 마음이 울리네요..!
샘을 글을 읽으며 남편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정년퇴직을 생각하면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느낌"이고 " 잘 살아오던 길에서 강제로 떠나라며 밀리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그 사람의 마음이 읽히네요. 남편의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부하고는 인연이 멀어진 터라, 심히 걱정이 되는군요. 아내인 제가 에세이를 쓰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걸 보면서 '참 이상하게도 산다'며 걱정하며 넌지시 말리려는 행동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죠. 남편에게 공부는 스펙과 관련된 공부이미지밖에 없을 테니끼요.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는 저로서는 공부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준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돈 들여 경험하는 그 많은 것들이 별로 부럽지가 않아서^^ 고정 수입이 끊긴다고 남편에게 바가지 긁을 일도 없을테구요...평생 가족 먹여살린다고 수고했다고, '당신이 보살'이라고 마음 깊이 다독여 줄 일이 남았네요.
퇴직 이후를 맞이 하는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저도 분발하겠습니다.
정년퇴직. 아직 경험한 건 아니고, 어쩌면 경험하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그동안 살아왔던 길에서 이탈한다는 게 한순간의 결심만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는 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부를 재밌게 하시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삶으로 일상을 재배치하는 것은 꺼리시더라고요. 공부가 대단한 게 아니라 다른 삶을 감행하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뜻이겠죠? 그런 점에서 자꾸만 가리고야 마는 마음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대목에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말로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실제로는 모래성보다 허술한 게 우리의 결심인데 그것들을 보는 작업도 뭔가... 뭉클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다른 삶에 대한 결심을 다지고, 단단하게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퇴직자의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결심을 다지는 글이란 점에서, 뭔가... 마음이 울리네요..!